기상 캐스터 출신 연기자 김혜은

“‘아내와 여자’가 3월에 종방돼 한 달 정도 푹 쉬었어요. 기상 캐스터로 일할 때는 사람들이 절 알아봐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는데 연기를 한 뒤엔 시청자들이 저를 마치 아는 사람 대하듯 자연스럽게 대해 주니까 오히려 편해요. 요즘은 누가 저를 쳐다보면 제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요.”1996년에 청주 MBC 아나운서 공채로 입사했으니 방송과의 인연도 올해로 14년째. 8년간 MBC 뉴스데스크 기상 캐스터를 거쳐 김혜은(36)의 ‘현주소’는 연기자다. 뉴스를 통해 전하던 일기예보 1분30초를 위해 하루를 살았던 것이 예전의 모습이라면 드라마 속 캐릭터에 푹 빠져 몇 달을 사는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비 올 것이 예상되면 노랑색 비옷을, 새해 첫날 뉴스에는 한복을 입고 나와 일기예보를 하는 등 그의 일기예보 스타일은 요즘도 기상 캐스터 지망생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큼 참신하고 톡톡 튀었다. 기상 캐스터 대부분이 그렇듯 프리랜서를 선언한 뒤 CF (Commercial Film)에까지 캐스팅되는 등 그의 커리어는 ‘쾌청’이었지만 그는 홀연 8년의 ‘공든 탑’을 뒤로하고 방송국을 떠났다.“아무리 후배들이 들어와도 저만큼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어요.(웃음) (나이든 여성 기상 캐스터는 후배들에게 밀린다는) 벽 같은 걸 부수고 싶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죠.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더 이상 할 이유가 없어졌어요. 정상에 있을 때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었죠.(웃음) 지금도 미련은 없어요.”그의 첫 출연작은 2007년에 방영된 MBC 일일 연속극 ‘아현동 마님’이다. 그런데 큰며느리 ‘신수경’으로 분한 김혜은을 보는 것은 영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낀 것 같았다. 깔끔하고 똑 부러진 방송인 김혜은의 얼굴을 광주 사투리가 섞인 전업 주부 ‘신수경’에 오버랩하기가 처음부터 쉽지 않았던 것. 부산 출신인 그가 광주 사투리를 그럴싸하게 연기하기까지는 고충이 뒤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캐스팅된 뒤 4개월 정도 광주대로 어학연수를 갔죠.(웃음) 전공이 성악인데 늦깎이 음대생으로 광주대 성악과에 등록했어요. 학생들에게 특강도 해주면서 아예 기숙사에 들어가 살았어요. 그때 딸아이가 두 살이었는데도 주말에만 서울을 왔다 갈 정도로 지독하게 했어요. 저보다 가족들이 힘들었죠. 요즘도 힘들면 그때를 생각해요. 초심을 되찾으려고요.”곱상한 외모에 어디서 그런 억척이 나왔을까 싶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의 고향은 부산이다. 그러고 보니 외모보다 훨씬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한 번 하면 한다는 강한 의지가 ‘부산 아지매’같긴 하다.그렇게 어려운 준비 과정을 거쳐 시작한 ‘아현동 마님’은 스타 작가와 스타 PD(프로듀서), 일일극이라는 3박자가 제대로 조화를 이루며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역시 ‘큰며느리’로 확실한 연기자 ‘신고식’을 할 수 있었다.“최근 작품인 ‘아내와 여자’의 쇼 호스트 김재란보다 ‘아현동 큰며느리’로 알아보는 분이 더 많아요.(웃음) 사실 ‘김재란’은 그 역할을 맡은 배우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캐릭터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일종의 악역이에요. 하지만 연기자는 악역 캐릭터라도 자기 자신을 100% 쏟아 부어야 해요. 그래서 제 자신을 깨부수는 작업이 가장 힘들어요. 한번은 ‘아현동…’을 할 때 정말 하기 싫은 장면이 있었어요. 긴 머리에서 단발로 변신한 아내에게 퇴박을 놓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긴 머리 가발까지 써 봤지만 냉랭한 남편 때문에 우는 신이었죠. 감정이 잘 잡히지 않아 선배 연기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그때 그 선배가 ‘캐릭터에 대한 비판은 시청자가 하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너무나 맞는 얘기죠.”‘불륜 코드’가 있었던 작품 ‘아내와 여자’의 ‘김재란’은 사실 그에게도 망설임을 갖게 했던 캐릭터다. 시쳇말로 ‘찐한’ 장면은 없었지만 남편을 비롯해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거쳐야 할 ‘악역’ 또는 ‘불륜’이라면 매도 먼저 맞자 싶었다.“일단 참 다루기 힘들다는 불륜이란 소재로 정면 도전한 작가 정신에 박수를 쳐 주고 싶어요. 김재란이란 여자는 불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결국 가정으로 돌아갔어요. 자신의 분야인 쇼 호스트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프로였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편에게서는 정작 사랑받지 못했던 여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을 무직으로 지낸 남편을 대신해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인 것이죠.”굵직한 일일극으로 꽤 성공적인 ‘연기자 신고식’을 치렀지만 연기자라면 누구나 겪는 ‘고배’도 마셨다.“지금 방영되고 있는 비중 있는 작품에 캐스팅됐다가 마지막에 번복된 일이 있어요. 처음에는 실망감이 컸지만 한 번 겪어 봤으니 다음부터는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것이 ‘이 역할은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칼을 갈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됐죠.(웃음) 하지만 드라마의 스타 작가라고 불리는 분들이 저를 캐스팅에서 지목해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요. 목표가 생겼으니 오히려 신나죠.”최근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장자연 사건을 보며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방송으로 경력을 다진 후 결혼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뒤 연예인이 되기를 참으로 잘했다 싶단다.“방송도 재미있었지만 연기의 맛이랄까요…. 이건 방송과 비교도 안될 만큼 짜릿해요. 하지만 너무 어려서 시작했다면 어쩌면 연기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이런저런 환경에 의해 상처만 받고 그만뒀을지도 모르죠. 제가 성악을 전공해서 그런지 뮤지컬 제의가 많았는데 노래는 실컷 해 봤으니(웃음) 뮤지컬은 연기로 경력을 더 다진 후로 미루고 싶어요.”연기에 한껏 물이 올랐다는 얘길 듣는 요즘, 역할에 대한 욕심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다.“억척스러운 주부 역할이랄까요. 요즘 ‘내조의 여왕’에서 김남주 씨가 맡은 ‘천지애’ 같은 역을 해보고 싶어요. 빠듯한 남편의 월급으로 버티는 삶이 힘들겠지만 그것을 인내하면서 밝게 사는 이 시대의 주부 말이에요. 자식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도 주부 아니고는 모르지 않겠어요?”9시 뉴스데스크의 1분30초를 위해 하루를 뛰었던 시간보다 하나의 캐릭터에 빠져 몇 달을 사는 요즘이 더욱 즐겁다는 그는 ‘따뜻한 홈드라마’에 욕심을 내고 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담는 드라마를 통해 그가 사는 모습도 살짝 녹여 나올지 모르겠다.약력: 1973년생. 서울대 성악과 졸업. 1997년 청주 MBC 공채 아나운서. 1998년 MBC 기상 캐스터, 8년간 신선한 방송 스타일로 주목 받음. 2006년 EBS ‘문화 예술 36.5’ MC. 기상 캐스터로 활동 중 MBC 드라마 ‘논스톱’,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 카메오로 출연. 2007년 연기자로 본격 전향. MBC ‘아현동 마님’, ‘뉴하트’, KBS ‘태양의 여자’, ‘아내와 여자’ 등에 출연. 2002년 MBC 창사 50주년 보도공로상 수상. 2005년 과학기술부 장관상, 최초 여성 기상 캐스터로 수상. 현재 기아대책기구 홍보대사.장헌주·객원기자 hannah31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