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안진의

5월 7~31일 서울 서초구 ‘갤러리 더 케이’에서 한국화가 안진의 씨의 초대전이 열린다. 꽃을 주제로 한국적 심상, 화려한 색채, 섬세한 손길을 보여주고 있는 안진의 씨를 만나 작품 세계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캔버스 위에 펼쳐진 형형색색의 꽃들이 한국화는 으레 수묵에 담채일 것이라는 일반의 고정관념을 시각적으로 깨뜨린다. 한국적인 색, 모양, 정신세계가 무엇인지를 오랜 세월 고민해 온 화가 안진의 씨의 작품이다. 사방에 꽃이 흐드러진 5월에 ‘꽃의 결, 마음의 결(Texture of flower, Wave of mind)’이라는 제목을 단 안진의 씨의 초대전이 열리게 됐다.“꽃이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꽃마다 특징이 다르고 운율과 같은 것이 생겨나거든요. 거기에 작가의 정서가 결합하면 화면에 춤추듯 부유하는 꽃이 태어납니다. 그 정서가 감상자에게까지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꽃의 결, 마음의 결’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됐어요.”안진의 씨의 꽃에 대한 관심은 한국 전통 복식에서 시작됐다. 동양화를 전공하며 패션 잡지를 보면서 옷감의 색들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 한국 옷의 색채는 어떤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화려한 동시에 차분한 맛이 있는 전통 복식의 색채에 끌리다가 옷에 수놓인 장식의 하나였던 꽃이 점차 그녀 작품의 중심 주제로 떠올랐다.“꽃집과 식물원을 다니며 꽃들을 관찰했어요. 우리나라 꽃들은 멀리 있는 사람을 유혹하듯 뽐내며 피지 않고, 사람이 찾아가서 다가가야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졌더라고요. 그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시기를 거쳐 제 주관에 따라 추상화하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눈부신 색채, 꽃의 향연인 안진의 씨의 그림을 어째서 한국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서양화와 동양화, 한국화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녀가 첫손에 꼽는 것은 양자의 가치관이다.“동양화는 주관을, 서양화는 객관을 중요시하죠. 서양화가 나의 시선을 남에게 입증하려고 하는 과정이라면 동양화는 자신의 주관을 추구하는 태도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표현에서는 중첩되는 면보다 과감한 선을 이용한다는 것이 동양화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다음은 재료다. 그녀는 유채나 수채 물감이 아닌 돌가루를 사용한다. 광물에서만 얻을 수 있는 독특한 반짝임이 평면적인 그림에 입체감을 부여해 준다. 또한 돌가루를 물과 아교에 개서 사용하기 때문에 석채(石彩)가 번지고 맺히는 물의 느낌이 기름기 없는 담백함을 선사한다.“재료가 스타일이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돌가루는 발색과 보존 면에서도 장점이 있습니다. 한국화 작가 중에 석채를 사용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저는 1989년께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한 편이에요. 한지를 오려 붙이는 등 혼합 기법도 사용합니다.”그녀는 일찍부터 동양화가 자신과 잘 맞는다고 느껴왔다. 중학교 시절 미술 교사의 작업실에서 풍기는 묵향이 마냥 좋았고 데생을 하더라도 동양화가 어울리겠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입시 미술을 배울 때도 판에 박힌 서양화보다 개성이 담긴 동양화 쪽에 마음이 더 갔다.“그림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내면의 심성부터 외부로 나타나는 색채와 모양, 또 한복의 꼼꼼한 재단과 바느질 같은 디테일 면에서도 한국성을 발견해요. 동양화를 하면서 얻게 된 원리와 가치관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그녀의 작품을 언뜻 봤을 때는 색깔과 형태의 배치에 압도된다. 그러나 화면 앞으로 한 발 내디뎌야만 놀랍도록 세세한 필치가 비로소 나타난다. 조형과 색채는 즉흥적으로 에너지를 분출해 만들어내는 반면 작품의 완성까지는 지루하고 고될 만큼 세밀한 작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돌가루를 쓰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이 까져 실핏줄이 터지는 과정이 반복되곤 합니다. 팔과 어깨에 무리가 오고, 특히 자주 사용하는 손목도 문제가 많죠. 창조는 머리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마무리는 결국 몸이 하는 일입니다.”그녀는 전시회를 자주 여는 편이다. 그만큼 다작을 한다는 얘기가 된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겨우 역작을 한 편 완성하는 예술가의 정형화된 이미지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자신의 작품을 찾는 초대를 쉽사리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으로 하는 작업을 묵묵히 해 나가면서 상당량의 작품이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직장인들이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면서 일하는 것과 같아요. 그림을 업으로 삼는 작가도, 작가로서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야죠. 그러다 작품이 모이면 밖으로 나가 타인의 평가를 받고 싶어지는 겁니다.”아침부터 저녁 6시, 때로는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작업이 그녀의 일상이다. 그림 그리지 않을 때는 뭐하느냐는 질문에 그림을 생각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신의 성격에는 온몸을 던져야 하는 이 일이 잘 맞고,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행복하단다.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인 그녀의 말이다.“나이가 들수록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다소 무덤덤해집니다.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눈이 안 보이고 손이 떨리는 노화 현상도 그 자체로 작품의 일부로 나타나고요. 모네가 백내장 덕분에 ‘수련’의 영롱한 색채를 그린 것처럼 말이죠.”듣고 보니 미술사에는 말년에 이전과 다른 작품 세계를 창조한 화가들이 많다. 시력이 나빠진 후 파스텔 회화에 몰두한 드가, 병상에서 종이를 오렸던 마티스 등이 그렇다. 평생 작가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어서 그림 그리기를 정말 잘했다는 그녀의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새삼 부러워진다. 그녀는 자신이 만족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영원한 숙제요, 풀리지 않는 갈증이라고 덧붙인다.또 다른 행복이 있다면 그녀와 교감하는 대중이 늘어난 것이다. 운동화 신고 배낭 메고 와서 월급으로 소품을 사겠다는 회사원, 태어날 아이에게 그림을 선물하고 싶다는 신혼부부 등 그림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림이 그녀에게는 평생의 벗이자 위안이라고 한다. 행복한 그녀의 그림은 5월 7~31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갤러리 더 케이’에서 만날 수 있다.약력: 1970년 출생. 1992년 홍익대 미술대 동양화과 졸업, 1994년 동 대학원 석사 졸업, 2007년 동 대학원 색채전공 박사 수료. 1991년 제13회 한국미술문화대상전 특선, 1992년 제15회 중앙미술대전 특선, 1993년 제1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199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2005년 제11회 마니프 서울국제아트페어 우수작가상, 2008년 골든아이아트페어 루미나리에상.김희연·객원기자 foolf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