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끙끙’, ‘휴’, ‘이여차’.그때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나를 업고 그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런 말씀 없이 긴 호흡만 내뱉은 채. 그때 내 나이 열다섯이었다. 나는 다리를 심하게 다쳐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도움을 주신 분은 바로 아버지였다. 당시 집안 사정이 어려워 산동네에 살았던 터라 버스 정류장과 집까지 거리가 꽤 멀었다. 약 1km.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2개월간 매일 나를 업고 데려다 주셨다.아버지는 본래 이렇게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 아니었다. 매우 엄격하고 말씀도 없으셨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오히려 내게 가르침이 됐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덕원군파 18세손 삼대독자로 황해도 금천에서 1940년에 태어나신 아버지는 7남매 중 장손이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풍에 걸려 모든 재산을 잃고 돌아가신 19세 때부터 고난을 많이 겪었다. 그로 인해 6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19세 이전까지 아버지는 부유한 가정에서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지내시다가 갑자기 고난을 맞게 돼 매우 힘들어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불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자신보다 친구들을 도와주는 삶을 사셨다.힘들게 살아오셨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남달랐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40여 년 동안 아버지는 많은 가르침과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내가 유학할 당시 아버지는 항상 사람은 고생해야 한다며 학비 외에는 돈을 주지 않으셨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돈을 보내주지 않았던 이유를 말씀하지 않아 원망도 많이 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의 고마움을 깨닫게 됐다. 돈이 없는 상황이 되자 절대 게으를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부지런함을 배웠기 때문이다.또한 아버지는 항상 내게 위만 보지 말고 아래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어렸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아버지의 말이 지휘자가 되고부터 아래를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어려운 점, 못사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음악의 폭도 넓어졌다. 동유럽에는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을 위한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게다가 아버지는 도움을 받기보다 남을 도와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보다 도움을 받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친구 때문에 부도가 난 적이 있었지만 그 친구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으셨고 나중엔 친구를 용서하기까지 하셨는데 나는 그러한 모습이 싫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니 아버지의 행동이 내 삶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걸 깨닫게 됐다. 오늘날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고 믿는다. 부모가 덕을 베풀면 자식이 덕을 받는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지금까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아들을 위해 고생하신 아버지를 사랑한다. 지금도 항상 사무실에 은퇴하신 친구들을 불러 그분들이 무료하지 않게 해 주시고 항상 나와 내 자식을 위해 걱정하시는 아버지에게 변변히 감사의 표현 한번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 기쁘다.올해 70세가 되신 아버지는 보기에는 50대 후반처럼 보일 정도로 건강하시다. 당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내가 힘들 것이라 지금도 나를 위해 건강을 챙기신다. 이러한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음악으로 열심히 만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아버지는 어려운 분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자식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은 항상 있었지만 표현하기 어려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이번 11월 소피아 필하모닉 내한 공연에서 보여드리고 싶다.이영칠·지휘자1970년생. 90년 미 메네스대 호른 연주학과 졸업. 2000년 뉴욕주립대 연주학 박사학위 취득. 현재 불가리아 플로브디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불가리아 소피아 필하모닉 종신 객원 지휘자, 체코 보헤미안 심포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