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불’을 활용하는 원자력발전은 오랜 시간 동안 캄캄한 암흑기를 보냈다. 1970~80년대 일어난 대형 원전 사고 후 원자력이 가진 돌이킬 수 없는 위험성이 전면에 부각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원자력발전은 한때 이를 포기하려 했던 인류에 의해 다시금 ‘구원’받았다. 새 밀레니엄을 맞은 지구촌의 가장 큰 화두가 된 ‘그린 에너지’로서의 가능성 때문이다. “20년 만에 가장 큰 호황을 맞았다”는 원자력발전 시장을 알아봤다.‘원자력 르네상스’가 올 것인가. 지난 30년간 원자력발전 시장은 암흑기를 보냈다. 1979년 펜실베이니아 주 TMI(Three Mile Island) 원전 사고 후 미국은 모든 원전 건설을 중지했다. 또 1986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강력한 반원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원전 최강국’이었던 미국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이 줄줄이 원전 건설을 중단했다. 여타 나라들도 여론을 의식해 덩달아 원전 건설을 포기했다.이후 2000년대 들어오면서 원자력발전 시장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변화는 가장 먼저 원전을 포기했던 미국에서 시작됐다. 현재 미국은 해가 갈수록 전력 사정이 나빠지고 있다. 특히 2000년 캘리포니아 주 제한 송전 사태와 2003년 뉴욕의 전기가 일시에 나가버리는 ‘블랙아웃’ 현상을 계기로 전기 부족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최원경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더구나 1960년대 건설한 미국 원전들이 속속 40년으로 제한된 인·허가 만료 기한을 맞았다”며 “발전 용량이 큰 원전이 인·허가 만료를 이유로 가동 정지에 들어가면 미국의 전력난은 더 심각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미국은 원전에 대해 안전 검사를 통과하면 20년을 추가 운전하도록 해줬다”고 설명했다.미국은 2005년 상원에서 통과시킨 포괄적 에너지 법안에 12억 달러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자금 지원을 포함시켰다. 특히 지난 3월 9일 미국 원자력 업계는 청정에너지원 확보를 위해 미 남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신규 원자로 31기를 짓는다는 계획을 미 원자력규제위원회(NRC)에 제출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내 신규 원자로 건설 프로젝트가 33~34개가량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전력 수요가 크기 때문에 정부에서 인가해 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또한 서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원전 관련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 온 프랑스는 국내 소비 전력의 80%를 원전으로 생산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그 덕분에 프랑스는 원전 건설을 중단한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스페인과 독일 등에 전기를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이런 프랑스를 보고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서서히 “원전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한국과학재단이 발간한 ‘2008 원자력 백서’에 따르면 미국 중국 인도 일본 러시아를 중심으로 신규 원전 건설이 추진 중이며 2030년까지 약 319기의 원전 건설이 예상된다. 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원자력 발전 용량이 매년 2.5%가량 지속적으로 증가해 2006년 말 370Gw에서 2030년 최소 447Gw~최대 679Gw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특히 인도는 현재 3% 미만의 원자력 비율을 2022년까지 용량을 8배 늘린 10%, 2056년까지 75배 증가시킨 26%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 중국은 2020년까지 40Gw나 늘리고 일본은 현재의 30% 비율을 향후 10년 동안 4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와 함께 인도네시아 베트남 터키 등은 원전 도입 검토를, 루마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추가 원전 건설을 추진 중이다.변준호 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원자력발전은 향후 20년간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자력발전은 CO₂ 배출량이 석탄의 100분의 1, 석유의 80분의 1에 불과한 청정에너지원”이라며 “전 세계적인 그린 산업 열풍으로 원자력 르네상스가 임박했다”고 설명했다. 변 애널리스트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436개의 원자력발전소는 2030년까지 300기 이상이 새로 건설돼 1000조 원 규모의 신규 수요가 창출될 것”으로 분석했다.‘원자력 르네상스’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질 앞으로의 대전(大戰)에서 한국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 한국은 총 20기(고리 4기, 월성 4기, 영광 6기, 울진 6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전체 발전 설비 용량으로 치면 2008년 말 현재 1771만6000kw로 세계 6위의 원전 강국이다. 원자력 발전량은 2008년 말 기준 1509억6000만kw로 전체 전력 생산량의 35.8%나 차지한다. 또 원전의 평균 이용률은 93.44%로 세계 평균 이용률 77.8%보다 15.6%포인트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설비 규모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원전 건설과 기술 자립으로 건설 및 운영 능력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다. 고리 1호기 건설 당시 100% 미국 기술에 의존했으나 ‘한국 표준형 원자로(OPR1000)’는 95%의 기술 자립을 이뤘다.최근에는 이런 성장을 기반으로 원자력 기술 종주국인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중국 등 세계 각국에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노리고 있다. 1993년 중국 광동원전의 운영 정비에 대한 기술 지원을 시작으로 해외 원전 사업을 시작한 한국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중국 터키 필리핀 인도네시아 루마니아 베트남 등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올 들어 주요 실적만 봐도 국내 유일의 원전 설계 회사인 한국전력기술(KOPEC)이 지난 1월 21일 그리스 ‘GRP-1 연구로 설계개선 용역’ 경쟁 입찰에서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 연구용 원자로 설계 개선 패키지 용역 분야의 첫 해외 진출이라는 개가를 올린 것이다. 한국전력기술은 작년 3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 최신 원자로 프로젝트 설계 참여 패키지 계약으로 원전 설계 기술을 미국에 역수출하기도 했다.두산중공업은 2월 초 원자력발전 설비 수출 시대를 연 지 12년 만에 ‘국산 원자로’를 처음으로 해외에 수출했다. 중국 친산에 원자력발전소용 가압 경수로를 수출한 것이다. 두산중공업은 이 외에도 미국에서 6개, 중국에서 2개를 각각 수주받아 제작 중이다.또 한국전력은 요르단에 국내 원자력 산업계의 숙원인 ‘한국표준형원자로’의 첫 수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3월 10일 요르단을 방문 중인 김쌍수 한국전력 사장은 “요르단이 원자력 발전소 1호기를 공개 입찰 없이 한국과 수의계약으로 진행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진전돼 한국형 원자로의 첫 수출이 가시화됐다”고 밝혔다. 한전은 요르단 외에도 루마니아 아랍에미리트 중국 터키 등에 대한 한국형 원자로 수출도 추진 중이다.지식경제부 자료에 따르면 두산중공업과 한국수력원자력 등이 지난 1993년부터 작년 9월까지 미국 중국 등 주요 시장에 수출한 원전 기자재 및 용역 실적은 총 18억 달러 정도로 보고 있다.특히 주요 원전 설비 및 기술 수출 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 두산중공업 한전기술 한전연료(KNF) 한전기공(KPS) 등 5개 업체의 원전 기자재 및 용역 수출 실적은 2008년(1~9월) 기준 9억6000만 달러로 지난 2000년 141만 달러 대비 8년 만에 670배나 폭증했다. 바로 전년인 2007년 3억5000만 달러 대비로도 1년 만에 3배 가까이 증가하는 등 기록적인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원자력발전과 관련한 각종 부품 및 보조 설비 산업도 활황이다. 국내 기업들이 강점을 보이고 있는 분야는 주로 이음새를 연결하는 피팅, 고온의 가스를 찬물로 만들어 주는 콘덴서, 불순 가스 등을 제거하는 데 쓰는 탈기기, 급수 가열기 급수 냉각기 등의 발전 보조 설비 등으로 알려져 있다.특히 최근 코스닥시장에서 상한가를 달리고 있는 범우이엔지는 복수기와 열교환기를 제작한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이 회사가 제시한 올해 매출 목표는 전년 대비 70%나 증가한 2600억 원이다. 또 지난해 국내 신고리 원전에 납품할 500억 원 규모의 콘덴서를 수주한 티에스엠택도 원자력 사업의 매출 증대가 예상되는 기업이다.원자력발전은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에서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식경제부가 밝힌 ‘제4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08~22년)’에 따르면 정부는 2022년까지 발전 설비 건설에 총 37조 원을 투입할 것이며 이 중 원자력에 대한 투자 규모를 26조 원으로 확정했다. 전체 사업비의 70%에 달하는 수준이다. 사업이 마무리되면 현재 36% 정도인 전체 발전량 대비 원자력 발전량은 47.9%까지 상승한다.투자 시기별로 보면 2009년에서 12년까지 11조2000억 원, 2013년에서 17년까지 10조3000억 원, 2018년에서 22년에는 4조6000억 원으로 대부분의 투자가 2017년 이전에 집중된다. 변준호 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원전 건설에 7~8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간접자본(SOC) 조기 투입에 따른 경기 활성화와 그린 산업 동참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공격적으로 자본을 투입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확고해 보인다”고 말했다.하지만 전문가들은 일본 프랑스 미국 등에 있는 메이저 기업과 한국 기업들의 기술적·마케팅적 간극은 꽤 크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개발한 토종 ‘한국표준형원전(OPR1000)’은 신고리 1호기와 2호기에 적용됐을 뿐 아직 국외에 수출된 사례가 없다. 또 원전 기술 수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플랜트 수출 사례도 아직은 전무하다.원전 기술의 척도라고 불리는 원전 설계 핵심 코드 확보도 필요하다. 설계 핵심 코드는 지금까지 원자력발전소 설계 시 전적으로 외국 프로그램에 의존해 왔다. 결국 원전 수출 시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이에 따라 한국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중소형 상업용 원전 기술’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IAEA에 따르면 몇몇 국가가 중소형 상업용 원전을 개발 중이지만 ‘스마트(SMART)’를 만든 한국을 제외하고는 이 원전을 만든 나라가 없다. IAEA는 중소형 원전 시장은 약 350조 원 규모의 시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스마트는 해수 담수화 설비와 연계해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전력을 공급하는 동시에 담수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해 향후 물 부족에 어려움을 겪을 국가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아이템이다.또 ‘4세대 원전’에도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한국이 수출을 추진 중인 원전은 3세대로 분류된다. 현재 프랑스는 2006년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2020년까지 4세대 실증로(상업용 바로 직전 단계의 원자로) 건설 방침을 천명했고 미국도 2020년 즈음까지 4세대 원전 건설 계획을 수립했다. 중국도 4세대 원전 실험로 건설을 내년에 완료하고 2020년까지 실증로를 건설할 방침이며 일본 역시 2025년까지 실증로 건설을 완료해 시장에 뛰어들 채비다.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도 2028년까지 제 4세대 원전의 실증로를 개발하기로 했다”면서도 “하지만 관련 부처는 물론 산업계까지 똘똘 뭉쳐 추진 중인 외국과 달리 한국은 교육과학부와 한국원자력연구원 만이 연구에 나선 상황”이라고 말했다.지난 2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두산중공업이 중국에 수출한 친산 원전용 원자로.정부는 2022년까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총 26조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사진은 부산시 기장읍 고리원전 인근에 건설 중인 신고리 1, 2호기의 모습이다. 1호기는 2010년, 2호기는 2011년 상업 운전에 들어간다.새롭게 형성되는 원전 시장을 두고 해외 유수의 원전 공급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과거와 다른 최근의 가장 큰 특징은 원전 공급사들이 신규 원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라이벌 관계에 있는 회사들과 과감한 짝짓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최원경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전 세계 원자력 시장은 크게 4개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도시바-웨스팅하우스 그룹, 아레바-미쓰비시 그룹, GE-히타치 그룹, ASE가 바로 그것이다.이 같은 현상은 2006년 10월 일본 도시바의 미국 웨스팅하우스 인수로 촉발됐다. 웨스팅하우스는 원전 시장에서 가장 큰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경수로’를 처음 개발한 회사로 ‘미국 원자력 기술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기업이다. 특히 2008년에는 웨스팅하우스가 경수로 방식의 또 다른 원천기술 회사인 컴버스천엔지니어링까지 인수함에 따라 도시바-웨스팅하우스-컴버스천으로 이어지는 ‘최강의 삼각편대’를 이루고 있다.사실 웨스팅하우스는 도시바에 인수되기 전 미쓰비시와 연대를 이루고 있던 기업이다. 갑작스러운 파트너의 부재에 위기를 느낀 미쓰비시는 ‘유럽의 강자’ 프랑스 아레바와 같은 해 10월 공동으로 신형 원전을 개발하기로 하는 등 도시바-웨스팅하우스 그룹에 맞불을 놨다. 또 도시바가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면서 견제의 필요성을 느낀 GE는 일본계 기업인 히타치와 연대를 맺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ASE는 러시아 기업으로 동유럽과 구 공산권 국가에서 여전히 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는 회사다.최 애널리스트는 “러시아의 ASE를 제외한 3개 그룹에 모두 일본 업체들이 끼어 있다”며 “일본이 ‘원자력 르네상스의 최대 수혜국’이라는 분석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