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는 지방 보호주의
중국에서 경기 부양을 타고 제후경제(諸侯經濟)로 불리는 지방 보호주의가 부활하고 있다. 내수 진작에 앞 다퉈 나선 지방정부들이 작년 10월부터 자기 지역 제품을 우대하는 정책을 쏟아 내면서 중국 내에서도 지방 보호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 중앙정부가 속속 내놓고 있는 10대 주력 산업 진흥책 중에서도 보호주의 색채를 띤 조항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미국 경기 부양 법안의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조항을 맹비난해 온 중국도 보호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제후경제의 확산은 지방 간 보호 장벽이 늘어나는 것으로 외국 기업의 직수출은 물론 현지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내수 시장 공략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대중 수출에 비상이 걸려 중국 내수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로서는 빨간 불이 켜진 셈이다.= 항저우시는 최근 자기 지역에서 생산된 TV 세탁기 휴대전화 등 가전제품을 구매할 경우 중앙정부 보조금에 별도의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자뎬샤샹(家電下鄕) 정책으로 가전제품 구매 시 가격 대비 13%의 보조금을 중앙정부가 지급하고 있지만 항저우산 가전제품을 살 경우 3%의 보조금을 더 준다는 것이다. 창춘시는 자기 지역에 있는 이치자동차가 만든 자동차를 구매할 경우 검사비를 아예 면제해 주기로 했다. 또 택시나 관용차 구매 때 이치자동차의 자동차를 우선 구매하도록 했다. 안후이성과 후베이성도 최근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면서 자기 지역에서 생산한 철강 시멘트 자동차 기계장비 가전제품 술 등을 우선 구매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산시성은 자기 지역에서 만든 약이 더 많이 팔리도록 자기 지역 제약 업체와 유 통업체 및 병원 간 접촉을 적극 유도하기로 했다.이에 대해 향토 기업이 낸 세금으로 향토 기업을 우대하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는 시각도 있지만 지방 보호주의를 척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허베이시가 최근 자기 지역 제품을 우선 구매하는 정책을 추진하다 이를 포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21세기경제보도와 경제관찰보 등 중국 언론들은 신보호주의 확산이라는 타이틀로 제후경제의 확산을 경계한다. 국무원 발전연구중심 발전전략 및 지역경제연구부의 리샹통 부장은 “보호주의 대상은 세수 증대 및 지역 경제 부양 효과가 큰 업종에 집중되고 있다”며 “보호주의는 스스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지방 보호주의를 감시 감독할 별도의 조직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은 지난해 8월 반독점법 시행에 들어가면서 지방 보호주의의 척결을 내세웠다. 행정 권력 남용을 금지함으로써 자기 지역 기업을 우대하는 지방정부의 관행을 법적으로 막겠다고 나선 것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경기 부양이 지방 지도부의 핵심 과제가 되면서 ‘우리 지방 기업 먼저’라는 보호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은 하나가 아니다’는 말은 제후경제의 폐해를 그대로 드러낸다. 중앙과 지방 간 경제적 분권화가 기형적으로 이뤄져 각 지방, 특히 성(省)급 지방정부가 마치 독립 관세 지역처럼 행동하는 것을 제후경제라고 부른다. 과거 중국의 봉건시대 제후처럼 각 지방정부가 반독립적 경제 권력을 행사함에 따라 중앙정부의 거시경제 정책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다. 근대 중국에서 제후경제가 다시 득세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78년 개혁·개방 이후다. 개혁·개방 이전 중국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정부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집행됐다.그러나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권력을 지방에 이양, 바람직한 중앙과 지방 간의 관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 분권화(下放權力) 정책을 실시했다. 먼저 지방정부에도 입법권을 부여하고 일정 범위 내의 외국인 투자 인·허가권을 인정했으며 지방의 재정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종전 중앙정부가 보유한 기업과 시장에 대한 지배권도 지방정부로 이양했다. 지방정부의 권한 확장은 지방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높여 경제성장을 촉진했다. 더욱이 지방의 경제성장을 지방 관리들의 업무 실적으로 간주한 인사 시스템으로 지방정부 지도자들은 과도할 정도의 특혜를 줘가며 외자 기업을 유치하는 등 지역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지방정부는 중국 개혁·개방 후 고성장의 주역이 됐다. 고정자산 투자 통계를 살펴보면 개혁·개방 직후 48%였던 지방정부 소관의 고정자산 투자 항목의 비중은 2003년에 85%까지 확대된 반면 중앙정부의 비중은 52%에서 15%로 대폭 축소됐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대리인’에 머물렀던 지방정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경제 주체가 되면서 지역의 이익과 상반되는 중앙정부의 정책을 저지하는 일도 나타났다.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 대책이 있다’는 말이 이를 보여준다. 개혁·개방 이후 1차 제후경제 물결은 고성장의 빛과 함께 경기 과열이라는 그림자도 만들었다. 중국 정부가 2004년부터 강도 높은 긴축을 실시하면서 지방정부의 투자 억제에 주력하면서 제후경제 분쇄에 나선 게 이 때문이다.문제는 제후경제가 지방 간 보호 장벽을 쌓는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주장삼각주 경제권에 속한 A성이 수년 전 C성에 전기를 팔려다 실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송전을 하려면 B성을 거쳐야 하는데 소형 발전소만 운영하는 B성이 A성의 값싼 전기가 들어와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기 지역 발전소를 도산시킬 것을 우려해 통과를 거부한 것. 당시 B성의 지도자는 A성에 “비행기로 전기를 싣고 가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전력뿐만 아니다. 담배 통신 제약 운수 농업 등도 중국에서 지방 보호주의가 강한 업종으로 꼽힌다.이번 2차 제후경제 물결은 일자리 창출이 큰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에 대한 보호주의 장벽도 더 높이고 있다. 중국은 2001년 ‘지방봉쇄 금지 규정’을 발표한 후 주장삼각주 등 지역 경제권 구축과 반독점법 시행 등 제후경제 대책을 계속 내놓고 있지만 경기 부양 흐름을 타고 제후경제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10대 주력 산업 진흥책의 하나로 추진 중인 경공업 육성책에 보호주의 조항이 들어 있어 외국 기업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경공업 육성책에는 소비 진작을 위해 술 화장품 귀금속 고급 시계 등에 대한 소비세를 내리는 대신 고가 소비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올리는 내용이 들어 있다. 최근 발표한 기계장비 및 조선 산업 육성책도 보호주의 논란이 제기될 수 있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지적이다. 국산 기계장비 구매 시 리스크를 보상해 주기로 한 것이다. 중국산 원양어선 구매 시 정부 자금을 지원해 온 정책을 2012년까지 연장하기로 한 게 대표적이다. 전자산업 육성책에 담긴 3세대 이동통신망 구축 등을 통한 경기 부양 역시 혜택은 주로 중국 기업에 돌아갈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세계무역기구(WTO)팀의 송영관 연구위원은 “자국산이나 자기 지역 제품 구매 때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은 명백한 WTO 규정 위반”이라며 “하지만 중국의 경우 WTO 정부조달협정(GPA)에 가입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 조달 시 중국산을 우대하는 것을 WTO가 문제 제기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국이 지난해 11월 내놓은 4조 위안(800조 원)의 경기 부양책이나 추가로 나올 부양책 효과가 중국 기업에 집중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 회복이 세계경제 회복의 견인차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반감시키고 있는 것이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