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위기로 번진 금융 위기

게이르 하르데 아이슬란드 총리는 지난 1월 26일 내각 총사퇴를 전격 발표했다. 아이슬란드는 금융 위기 속에 지난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1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정부의 실정을 묻는 시위가 이어져 왔다. 3개월에 걸친 시위대의 퇴진 압박을 견디지 못한 채 결국 연립정부가 붕괴된 것이다. 이로써 한때 유럽의 ‘강소국’으로 꼽혔던 아이슬란드는 금융 위기 여파로 정권이 와해된 첫 번째 사례가 됐다.지구촌 전체를 덮친 금융 위기가 곳곳에서 정치 위기로 비화되고 있다. 경기 침체는 영국 등 선진국들의 리더십마저 위협할 태세다.금융 위기로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는 러시아는 최근 시위가 잇따르며 정치적 혼란 국면으로 빠져들 조짐이다. 시위대의 성난 목소리는 지난 8년간 러시아의 ‘국부’로 군림해 온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사임까지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지난 1월 31일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3000여 명의 시민이 올 1월부터 적용된 수입차 관세 인상에 항의하며 푸틴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모스크바에서는 1000여 명의 공산당원들이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로의 복귀를 선언하면서 정부의 금융 위기 대책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 최대 야권 세력인 전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이끄는 ‘연합시민연대’ 소속 회원 100여 명도 ‘푸틴 없는 러시아’를 외치며 지하철역 등에서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다 친크렘린 성향의 청년들과 충돌하기도 했다.러시아뿐만 아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는 최근 1만 명이 의회 점거 농성을 벌였다. 불가리아와 그리스 등지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다.모두 공통적으로 금융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경제 위기를 초래한 정부의 실정을 성토하고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는 양상이다. 1974년 이후 최악의 소요 사태에 직면한 그리스의 경우 15~24세의 실업률이 21.2%에 달하고 25~34세의 실업률은 10.4%를 기록했다.올해 극심한 경기 침체가 예고되는 가운데 마이너스 성장과 빈부 격차 확대, 근로자 대량 해고에 직면한 각국에서 경제 파탄에 따른 반정부 시위가 도미노처럼 번질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영국 런던정경대(LSE) 로버트 웨이드 교수는 “글로벌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져 일부 국가에선 정권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달했다”며 “올봄이 정점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정권 퇴진 시위까지는 아니지만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도 리더십이 위협받는 지경이다.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 유럽을 대표하던 영국의 금융이 흔들리면서 최근 파운드화 가치는 1985년 이후 24년 만에 최저치로 폭락하는 등 위기를 겪고 있다.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는 “더 이상 파운드에 베팅하지 않는다”고 밝혔고,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설립했던 상품 투자의 대가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은 “영국은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졌다”며 영국 경제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 심지어 로저스는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없는 영국을 떠나라고 권유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영국을 비롯해 라트비아 그리스 우크라이나 니카라과 등 5개국이 금융 위기로 연립정부가 붕괴된 아이슬란드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금융 비중이 큰 영국의 경우 고든 브라운 총리의 리더십도 위기에 처했다고 전했다.프랑스 노동 단체들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경제 위기 대책과 각종 개혁 정책을 비판하는 연대 총파업에 들어가 공공 서비스 기능이 거의 마비되기도 했다. 변호사와 초·중등 교사, 대학교수 등도 정부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일자리 감축 등에 반발, 파업에 동참해 거리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이 밖에 독일 국영 철도 회사인 도이체 반 노조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는 등 유럽 곳곳이 경제 위기에 따른 시위와 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