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농공민들의 귀향

중국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노동자)들이 역류하고 있다. 춘제(春節: 설) 때 나타나는 일시적인 귀향 행렬과 다르다. 춘제 1주일 전부터 귀향길에 오른 예년과 달리 이번엔 두 달 전부터 기차역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중국 수출 기업들의 도산 도미노가 확산되면서 길거리로 내몰린 농민공들이 서둘러 귀향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춘제 때 돈과 선물을 싸들고 귀향길에 올랐던 농민공의 짐에는 춘제 이후 일자리를 걱정하는 시름만 가득 담겨 있었다. “올해에만 2000만 명의 농민공들이 연해지역의 도시를 떠날 것(앤디 시에 전 모건스탠리 이코노미스트)”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10여 년간 매년 1000만 명의 농민들이 도시로 흘러들어 오던 흐름이 뒤바뀌는 것이다.농민공의 귀향은 노동 인구의 이동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세계적인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은 “중국의 경제 기적은 19세기 유럽처럼 농촌인구의 도시 이동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농민공의 귀향이 과거 개혁 개방 30년을 지배해 온 중국의 성장 모델에 대한 대수술을 예고하고 있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중국은 1949년 건국 이후 농민의 도시 유입을 철저히 제한했다. 도시는 자본집약적인 중공업 육성에 올인(다걸기)했고 잉여노동력을 농촌으로 내려 보냈다. 특히 문화대혁명 때는 4000만 명의 도시 지식 청년과 주민들이 농촌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1978년 개혁 개방 이후 노동력의 역류가 나타났다. 도시는 수출 공업기지로 변신해 갔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저가 노동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5년 전만 하더라도 하루 2달러만 받고도 일할 인구가 중국에선 7억 명이 넘는다는 분석이 있었다. 19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때에 비해 진보된 기술 덕택에 수천 배나 빠른 속도로 물건을 만들어 내면서도 급여 수준은 당시 노동자들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농민공의 유입은 도시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조셉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21세기 세계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두 가지 핵심 요인이라며 ‘미국의 첨단 기술’과 함께 꼽은 ‘중국의 도시화’가 본격화된 것이다.충칭이 대표적이다. 여행 작가인 찰스 더들리 워너가 “이렇게 급속하게 성장한 도시는 역사상 견줄만할 곳이 없다. 황제의 칙령으로 습지에 세워진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제국과 황제의 권력이 결합해 창조된 베를린조차도 성장 속도에서는 뒤진다”고 했던 미국의 시카고도 충칭에 비하면 성장 속도는 한참 처진다. 시카고는 1900년 인구가 170만 명이 되는데 50년이 걸렸다. 충칭은 그보다 성장 속도가 8배 빨랐다. 1998년 이후 불과 6년간 충칭 인구가 170만 명 증가한 것.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1949년 중국에서 100만 명 이상 도시는 5개, 50만~100만 명 도시는 8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2000년에는 40개와 53개로, 2007년에는 117개와 106개로 급증했다.= 하지만 농민공을 ‘세계 공장’의 일꾼으로 만든 개혁 개방 정책은 구조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기 소르망은 과거 프랑스와 영국에서 농촌인구의 집단 이동이 만든 ‘인간 비극’보다 중국은 더욱 잔혹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게 된 역사적 배경을 중국의 공산당 스스로가 만든 건 아이러니다. 산업혁명 당시 유럽은 그래도 교회와 자선 단체라는 사회적 완충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이 같은 완충장치가 거의 부재했다. 이 때문에 시골을 떠난 중국 농부들은 ‘시장의 힘’ 앞에서 알몸이 됐다. 저가 노동력으로 포장된 임금 착취가 성행한 것이다. 그러나 빈부 격차 확대로 농민공의 불만이 커지면서 순종적인 프롤레타리아 공급이라는 공산당의 역할이 바뀌기 시작했다. 선진국들도 중국의 인권 개선을 요구하면서 중국의 노동자 착취에 기반한 저임금 경쟁력은 설 자리를 서서히 잃게 됐다. 중국 정부가 외국 기업에까지 노조 설립을 강권하고 임금 인상을 유도하고 지난해 노동계약법을 시행하는 등 친노동자로 선회한 것은 이 같은 배경을 뒤로하고 있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발 금융 위기가 터졌고 자금난을 겪는 기업들은 노동계약법 부담에 야반도주하는 일까지 빚어졌다. 이는 농민공들에게 실업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농촌은 주수입원인 농민공들의 송금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억 명에 이르는 농민공들이 춘제 이후 실업과 빈약한 사회 안전망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최근 보도했다. 신화통신 자매 잡지인 랴오왕(瞭望)도 최근 “귀향하는 농민공들이 춘제 이후에도 실업자로 계속 남는다면 올해 대규모 소요 사태가 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미국발 금융 위기로 중국에서만 67만 개의 영세기업이 문을 닫고 67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농민공의 유민(流民)화가 중국 당국을 긴장하게 하는 건 진나라의 ‘진승, 오광의 난’부터 한나라의 패망을 불러온 ‘황건적의 난’, 당나라를 무력화한 ‘황소의 난’, 청나라의 노쇠화를 촉진한 ‘태평천국의 난’ 등 왕조 교체기마다 민란이 발생한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춘제 선물로 저소득층 7400만 명에게 총 90억 위안(1조8000억 원)을 지급한 것도 일자리 걱정만 안고 귀향한 농민공들이 폭민화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다. 지방정부의 올해 최대 과제는 귀향한 농민공들의 취업 해결이 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농민공의 귀향을 위기뿐만 아니라 기회로 보고 있다. 수출 의존 경제에 소비를 성장 동력으로 추가하는 구조개혁의 계기로 삼으려는 것이다. 작년 말 농민들의 토지경작권 매매를 허용한데 이어 귀향 농민공의 농기계 구입과 창업 등 정착 지원을 위해 100억 위안(2조 원)을 투입하기로 하는 등 도시에 집중된 부(富)를 농촌으로 이전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토지경작권 매매 허용으로 창출될 부가 2조50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는 농촌의 소비시장을 키우게 된다. 농촌에서 TV 휴대전화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살 때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가전하향(家電下鄕) 정책이 14개성에서 2월부터 전국으로 확대돼 4년간 실시된다. 이에 따라 최소 9200억 위안(184조 원) 규모의 새로운 농촌 시장이 창출될 것으로 기대된다. 1979~86년 농촌 최종 소비 증가의 국내총생산(GDP) 공헌도는 37%에 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10% 이하로 떨어졌다. 도농 간 소득 격차가 지난해 3.36 대 1로 커지는 등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 소비를 일으키기 위한 중국 정부의 농촌으로의 부 이동은 생각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중국 런민대(人民大)와 미국 미시간대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 농민의 절반가량이 자신들의 토지경작권에 대해 공문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농민들이 토지에서 부를 창출하는데 애로를 겪을 전망이다. 특히 농민공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나기 전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농토를 임대계약해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다.오광진·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