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밑 개발 러시 왜?

얼마 전 개봉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는 19세기에 유행한 ‘지구공동설’이란 가설에 모티브를 둔 영화다. 지구공동설은 지구의 속이 비어 있고 남극과 북극에 그 비어 있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는 주장이다. ‘땅속’세계에서의 삶을 꿈꾸는 인간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 가설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현실이 됐다. 물론 지구의 속이 텅텅 비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대규모 ‘지하 공간 개발’을 통해서다.일례로 프랑스 파리의 라데팡스는 ‘지하 공간 개발’ 수준을 넘어 ‘지하도시 개발’ 단계로 진입한 대표적 사례다. 철저한 계획도시인 라데팡스는 지하 공간을 잘 활용해 ‘복층 구조 도시’로 구축됐다. 도로 지하철 철도 주차장 등 모든 교통 관련 시설은 지하에 설치됐다. 그 위에 인공으로 상판을 덧대 보행자 전용 공간을 만들었다. 743만㎡ 규모의 도심 전체를 뒤덮은 광장과 녹지는 지하 공간 개발을 통한 수혜물이다.이 밖에도 영국 런던의 커네리워프, 일본 오사카의 크리스타 나가호리 복합지하상가와 도쿄의 야에스 지하, 캐나다 토론토의 유니온역 인근, 싱가포르의 오차드로드 인근 등이 대표적인 ‘지하도시’들이다.최근 국내에서도 이들 사례와 같이 지하 공간을 활용한 개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하 공간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서울시다. 이미 2007년 2월 ‘지하 공간 기본계획’을 수립한 서울시는 동대문과 용산, 영등포 등을 시범지구로 정하고 개발을 추진 중이다. 현재 개발되는 강서구 마곡지구와 송파구 문정지구에도 새로운 개념의 지하 공간을 도입한다는 계획도 세웠다.이 중 진척이 가장 빠른 곳은 영등포 신한은행 앞에서 시작해 영등포 사거리에서 끝나는 영등포 지구다. 연면적 9385.9㎡로 2010년 8월 공사가 완료된다. 동대문 지구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과 연계돼 추진 중이다. 동대문운동장과 밀리오레, 청계천으로 연결되는 흥인문로를 따라 개발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도로와 공원의 지하 공간을 결합해 개발하는 게 특이점”이라며 “2010년 말까지 개발을 완료하는 일정을 세워 놓고 있다”고 밝혔다.가장 대규모로 개발되는 용산은 용산역과 국제업무지구, 한강을 따라 수로와 녹지로 조성되는 ‘용산링크’ 사업의 일환이다. 지하 1층은 문화 상업 공간과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지하 2~3층에는 공공 주차장과 주차장 사이를 연결하는 지하 순환도로가 만들어진다. 또 지하철 4호선과 용산역을 땅 밑으로 연결해 23만7775㎡ 규모의 거대한 지하세계를 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마곡지구는 첨단산업단지의 특징을 살린 지하 공간으로, 문정지구는 ‘선큰’을 활용한 지하 공원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천장을 완전히 가리지 않고 지하를 개발하는 ‘선큰’ 기법은 지하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어 쾌적한 것이 장점이다.서울시는 또 최근 서부 간선 지하에 월드컵 대교에서 독산동까지 11km를 잇는 ‘대심도(大深度) 지하터널’ 건설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대심도란 지하 40m 이상을 의미하는 말로 서울시는 이곳 외에도 남북·동서 관통형 도로, 순환형 도로 등 도심에 여러 개의 대심도 도로를 건립하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다.정부는 아예 대도시와 수도권의 지하 공간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지하 공간 기본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여기에는 지하를 공공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기 위한 대심도법과 지상의 지구단위계획과 같은 지하이용계획지구 지정 법안 등이 포함돼 있다.이에 따라 여러 연구기관 등이 앞 다퉈 땅속 개발을 제안하고 있다. 현재까지 나온 프로젝트는 대심도 급행 전철 건설과 지하 고속도로 건설, 해저 고속철도 등이다. 이들 사업 중 대심도 급행 철도 등 일부는 2008년 말 국토해양부가 2009년 업무계획 중 ‘한국판 10대 뉴딜 정책’에 반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한국교통연구원은 목포에서 제주로 이어지는 167km의 고속철을 제안하며 보길도와 제주도를 있는 73km는 해저 터널 건설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 경우 추정 사업비는 총 14조6000억 원으로 예상되지만 생산 유발 효과는 약 44조 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교통연구원은 수도권 고속도로 구간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경부고속도로 수원IC에서 한남동 구간과 경인 고속도로 전 구간에 지하 고속도로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또 경기도는 화성 동탄에서 서울 삼성동을 오가는 대심도 급행 철도를, 산업은행 등은 삼성역에서 일산을 오가는 대심도 급행 전철 건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대심도 급행전철이 검토되는 구간은 위례신도시~과천, 용산~송파를 비롯해 국토부해양부가 고려하는 하남 또는 의정부~서울역, 부평~영등포 등 10개가 넘는다. 경기도는 또 고양 한류우드 사업에서 상업과 주거지역을 연결해 49만㎡ 규모의 대규모 패션 상가를 개발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이처럼 ‘지하 공간 개발’에 정부와 지자체가 앞 다퉈 뛰어들고 있는 이유는 먼저 경기 부양 차원에서다. 한국은 물론 세계가 경제 위기 극복의 해법으로 건설 경기 부양에 초점을 두고 있다. 지하 개발과 같이 막대한 재원이 드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은 건설 경기 부양에 안성맞춤이다.무엇보다 지하 공간 개발은 보상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사실 대규모 개발은 사업비도 사업비지만 보상 문제가 큰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대심도의 땅속을 개발할 때 보상 의무가 거의 없다. 현재 추진 중인 ‘지하 공간 기본법’은 이를 법적으로 명문화하는 법안이다.현재 우리나라는 지자체의 조례로 대심도를 규정하는데 서울시의 경우 고층 시가지는 40m, 중층 시가지는 35m, 저층과 주택지 30m, 농지와 임지는 20m 깊이 이상이다. 우리보다 앞서 관련법을 2000년 제정한 일본은 지하 40m 이상 지하를 토지 소유자의 동의나 보상 없이 공공시설을 원활하게 설치할 수 있도록 못 박았다.아울러 지상 개발과의 연계 시 개발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지상에는 다양한 높이의 고층 빌딩을 건립해 사무실이나 호텔들을 사용하고 지하에는 교통망, 대형 쇼핑 공간, 주차장, 공공시설을 설치한 ‘압축 개발’이 가능하다.특히 지하 공간 개발은 주로 도심권에 이뤄지기 때문에 SOC사업의 함정 중 하나인 ‘갈 곳 없는 다리(Bridge to nowhere)’처럼 목적 없이 그저 돈을 쓰기 위한 사업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대운하계획이나 4대강 정비사업 논란에서와 같은 민원 발생이나 환경 규제에서도 비켜갈 수 있다.서울역~용산역 간 지하화를 추진해 녹지, 도로, 주차장 등의 공간을 확보하자는 안을 마련해 놓고 있는 한나라당 의원실 관계자는 “지하 공간을 개발하면 도심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것은 물론 지상의 교통난도 함께 해결할 수 있다”며 “특히 지상 공간이 소진된 도심에서 지하 공간은 귀중한 자원”이라고 강조했다.최근 지하에 대규모 캠퍼스를 만드는 대학들이 크게 늘고 있다. 지상에는 더 이상 시설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 달하자 지하 공간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고려대는 인문계와 자연계 캠퍼스에 각각 지하 광장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특히 인문계 캠퍼스 중앙에 자리 잡은 중앙광장은 ‘고엑스(고려대+코엑스)’로 불리며 이미 명물로 자리 잡았다. 지하 3층, 지상 1층에 2만8000㎡ 규모에 이르는 이곳은 강의실 도서관 세미나실 등 학습 공간과 공연장 등 다양한 문화 공간과 커피 전문점, 서점 등이 들어차 있다.이화여대의 이화캠퍼스복합단지(ECC)는 국내 최대의 지하 캠퍼스다. 지하 6층에 무려 6만6116㎡의 규모다. 연면적이 신촌캠퍼스 전체 부지의 10%가 넘는다. 특히 유명 건축가인 도미니크 페로가 디자인했으며 운동장으로 쓰던 땅을 반으로 쪼개 거대한 통로를 만들고 양쪽에 지하 건물을 넣은 아이디어가 빛난다. 서울시 건축상을 받기도 했다.이 밖에도 국민대 서강대 등이 지하 캠퍼스를 속속 완공하거나 준공을 앞두고 있다. 경원대는 900억 원을 들인 연면적 7만㎡ 규모의 지하 캠퍼스를 2009년 완공할 예정이다. 서울대도 늘어나는 시설을 수용하기 위해 지하 캠퍼스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이홍표 기자 hawlli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