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원칙 ②

릴리 프랭키 ‘도쿄타워’인생을 놓고 볼 때 부모와 자녀가 함께 알콩달콩 살아가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면 부모의 영향권에서 아이는 벗어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된다. 가정을 꾸미면서 부모 품에서 벗어나지만 그 역시 부모가 되어 인생의 여행에 나선다.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가족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반면 가족 해체의 시대일수록 가족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가족은 특히 지금과 같은 위기 시에 강한 힘을 제공한다. 독일의 프랑크 쉬르마허가 쓴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나무생각 펴냄)’를 보면 가족이 위기에 처할 때 얼마나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니는지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미국 서부개척시대였던 1846년에 81명이 캘리포니아 주를 향해 길을 떠났다. 일행 중에는 12명과 8명 등 대가족들과 혼자 여행하는 사람 몇 명, 이 지역 지리에 밝은 안내인도 끼어 있었다. 희망을 찾아 길을 나섰던 그들은 11월에 도너 계곡에서 눈 폭풍으로 그만 발이 묶이고 만다.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1847년 4월 25일 40여 명이 구조됐다. 상식적으로 젊은 청년들이 살아남았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이들은 거의 대부분 사망했다. 하지만 가족이 있던 노인과 병자, 어린아이들은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했고 대부분 살아남았다. 이를 통해 저자는 위기 시에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조건은 바로 가족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가족과 함께 있었느냐, 혼자 있었느냐가 생존을 좌우한 유일한 이유였다는 것이다.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랜덤하우스 펴냄)’는 가족 해체 시대에 가족의 소중함을 반추해 볼 수 있다. 한 소년의 성장사를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엄마와 나, 때때로 아빠’의 부제처럼 ‘온전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는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 집을 나와 탄광촌에서 아들과 단둘이 산다. 함께 살지 않는 아빠는 ‘때때로 아빠’의 역할을 할 뿐이다. 가족은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파도에 휩쓸려 형체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부모자식’은 계속해서 덧셈이지만 ‘가족’은 더하기뿐만 아니라 빼기도 있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희곡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온갖 성실한 것 중에서 결혼이라는 놈이 장난을 가장 많이 친다.’주인공인 마사야는 탄광촌에서 어머니 에이코와 단둘이 살지만 우울하지 않다. 아버지(참으로 무책임한 아버지여서인지 이 소설에서는 이름조차도 없다!)가 없는 상황도, 풍족하지 못한 형편도 그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아버지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함께 살지 않으면서 생활비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무튼 ‘있다’라는 것으로 나를 안심시켜 주는 존재”였다. 때로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긍정이야말로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아닐까. 아버지를 부정할수록 자신만 더 괴로울 뿐이므로. 어느 사람은 말했다. “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보다 제대로 된 가정을 가지고 가족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탄광촌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살게 된 마사야는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낸다. 결코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가난은 비교 대상이 있을 때 느껴지는데, 누구나 ‘필요 이상’으로 얻으려고 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이 ‘필요 이하’로 비춰지는 것이다.“도쿄에서는 ‘필요한 것’만 가진 자는 가난한 사람이 된다. 도쿄에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져야 비로소 일반적인 서민이고 ‘필요 과잉한 재물’을 손에 넣고서야 비로소 부유한 사람 축에 낀다.” 재물이 많을수록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근 4000억 원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청룽(成龍)은 “창고에 귀중품을 채울수록 오히려 큰 짐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누구나 그 덧없음을 느낄 때까지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고만 하는데, 이게 또한 우리들 대부분의 자화상이다. “가난하더라도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부자, 그것도 대단한 부자다. 하지만 부자라도 언제 가난해질지 모른다고 겁을 내며 사는 사람은 헐벗은 겨울 같은 법이다.”(셰익스피어의 ‘오셀로’ 대사 중에서)‘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100엔’은 가난하지 않지만 ‘할부로 사들인 루이비통 지갑 속의 전 재산이 1000엔’이라면 그건 슬프도록 가난하다.이 소설을 읽으면 처음으로 눈물을 글썽이게 하는 대목이 있다. 아들이 고교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김으로 싼 주먹밥을 여행 가방에 담아 처음으로 엄마 품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는 아들에게 건네준다. 기차를 타고 가던 아들이 가방을 열자 도시락 밑에는 엄마가 쓴 편지가 있었다. “네가 고등학교에 합격해서 정말 기뻤다. 엄니 일을 걱정하지 말고 몸 건강하게 열심히 공부해라.” 아들은 주먹밥을 먹으면서 편지를 읽다 그만 목이 메고 만다.‘때때로 아빠’는 이따금씩 아들에게 멘토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멘토링이 좀 짓궂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무엇을 할 거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우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때 아버지는 뜻밖에도 “네가 정한 대로 하라”며 백수가 되겠다는 아들을 전폭 지지한다. “그림을 그리건 아무것도 안 하건, 어떤 일에나 최소 5년은 걸리는 거여. 일단 시작하면 5년은 계속해. 아무것도 안 할 거라면 최소 5년은 아무것도 안 하도록 해봐. 그것도 힘든 일이여.”아버지는 “도중에 역시 그때 취직했더라면 좋았다느니 어쩌느니 했다가는 너는 백수건달로서의 재능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백수로 지내려거든 일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때까지 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백수의 철학’이 아닐까. 이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참 철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백수를 5년 동안 하다 보면 일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가 되게 마련. 세상의 밑바닥까지 경험하고 ‘헝그리 정신’이 들게 되면 비로소 일을 해야겠다는 자세가 나올 수 있다.삶의 치열성은 이렇게 오는 것이다. 아버지가 들려준 ‘개똥철학’은 이런 세상의 이치를 멘토링해 준 것일 게다. 아들은 ‘질 낮은 자유’를 만끽하며 월세를 낼 돈조차 없이 백수로 전전하다 결국 프리랜서로 성공한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청년 백수들이 일말의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또한 아버지는 실연한 아들에게 연애의 법칙에 대해 다시 한 번 특유의 개똥철학을 일러준다. 이른바 ‘화성남자, 금성여자’론이다. “여자한테는 말로 꼭 해줘야 혀. 분명하게 말로 해주지 않으면 여자는 모르는 거여.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마찬가지다. 1 더하기 1이 2라는 것을 왜 굳이 말로 해야 하나, 뻔히 다 알 거라고 생각했고만. 그렇지만 말이지, 여자는 모르는 거여. 그게 2가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로 해줘야 하는 모양이더라.”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도쿄에 온 어머니는 아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내리사랑을 엿볼 수 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돈을 타 쓰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인데도 함께 살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다.아들은 15년 만에 어머니가 지어 주는 밥을 다시 먹게 된다.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들이 오면 “젊은 사람들은 항상 배가 고픈 법이여”라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준다. 집에는 어머니가 차려 주는 음식을 먹으려고 친구들로 북적이는데…. 지나고 나면 이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안다. 어머니의 음식은 나중에 그리움이 되고 눈물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란 욕심 없는 것입니다./내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내 자식이 큰 부자가 되는 것보다/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주기만을/진심으로 바라고 기원합니다.(어머니 에이코가 쓴 메모에서)마지막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은 (위암으로) 엄마가 죽은 후 개봉해 보라는 상자를 아들이 열 때다. 상자에는 꽃 같은 엄마가 갓난 아들을 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만큼 행복한 여인이 또 있을까.‘가족은 나의 힘!’ 새해에는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과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되기를.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