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18년생이시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다 가셨다. 그분들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는 일제 식민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20대 때 광복을 맞았고 그 혼란기를 몸으로 겪어야 했다. 그리고 30대 초에 6·25전쟁을 겪었다.아버지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중요민속자료 8호인 운조루(雲鳥樓) 5대 종손의 넷째 아드님이셨는데 왜 고향을 떠나셨는지, 왜 당신 아들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으셨는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이셨다. 할머니 생전에 들은 “글이 원수다. 장사를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는 10대 때 가출했다고 한다. 인천으로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회사에서 일을 하셨는데 상당한 기반을 닦으셨다고 한다. 광복이 되자 아버지는 부산에 정착했다. 결혼도 하고 삼천포의 부모님과 조카들을 부산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동생 남매와 처남, 조카들을 교육시켰다. 당신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셨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셨다.6·25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 수도 부산에서 아버지의 사업은 승승장구를 달렸다고 한다. 30대 때 당시 부산의 소득세 납부 2위를 기록했었다는 말을 생전의 어머니로부터 전설처럼 전해 들은 바 있다.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의 출발은 부산 역전 대화재 때부터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산 중심부를 휩쓴 큰 불로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청과물 회사는 잿더미가 됐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외가가 있는 초량의 동회 앞뜰에서 했다.아버지는 폐허를 딛고 청과물 회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광산업에도 손을 댔다. 서부 경남의 고령토 광을 개발해 상품화를 눈앞에 두었을 때 현지 폭력배들의 위협으로 사업을 포기했었다고 한다. 참으로 무법천지와도 같은 시절이었다.부산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토건업을 하면서 서면에 부산 초유의 경마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경주마를 구하지 못해 실패하고 영도에 극장을 지었으나 역시 실패했다.아버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안긴 것은 가덕도 간척 사업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산을 죄다 쏟아 붓고는 실패로 끝났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우리 집에 들끓던 빚쟁이들과 어머니의 울음, 그리고 아버지가 친구들에게 ‘나는 남자로서 하고 싶은 일은 다해 봤으나 안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던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재기를 꿈꾸던 아버지는 부산역 광장에 산업 전시회를 열어 성공하자 그 여세를 몰아 대전에서 두 번째 산업전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 생애의 마지막 시도가 되고 말았다.아버지는 쉰여섯 살에 뇌일혈로 쓰러지셨다. 친척들이 아버지 병문안을 하고 있는 그 시각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심장병을 오래 앓고 계셨다. 그 뒤 아버지가 큰아들인 나를 따라 사신 17년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아버지는 참으로 담대하신 어른이셨다. 토건업을 하실 때 까마득한 높이에 설치된 시설물 위를 날아다니듯이 왕래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감탄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운명의 연타에 결코 굴하지 않으셨다. 쓰러지면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진실로 아쉬운 것은 아버지가 일찍 건강을 잃으신 점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술을 드시면 나를 안아보려고 하며 즐거워하셨지만 자상한 편은 아니었다.나는 내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일까. 아들에게 좋은 사표가 되고 있을까.부끄럽게도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운 좋게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던 때문에 아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겪게 하지 않았지만 강한 아버지, 존경받는 아버지의 모습은 되지 못한 것 같다. 하긴 세태가 너무 달라져 아버지나 아들이나 옛날 같지 않은 점이 있기는 하다.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지의 담대함과 불굴의 투지, 그리고 한없는 깊이를 흠모한다. 종교에 심취하기는 하지만 귀의하지는 못하는 내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나의 거울이다.1947년 부산 출생. 부산고,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 졸업. 1972년 시조문학으로 문단 데뷔. 1993년 SBS 국제부장. 2000년 SBS라디오센터장. 2004~05년 SBS 논설위원실장. 2007~08년 방송기자클럽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