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
‘카이스트(KAIST) 석좌교수 안철수.’ 2008년 12월 23일 여의도 안철수연구소 본사에서 만난 안철수(46) 의장은 트레이드마크가 된 겸손한 미소로 새 명함을 건넸다. 지난 2008년 5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안 의장은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부임해 지난 학기부터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고 있다. 카이스트가 있는 대전에서 주로 생활하며 1주일에 2~3일 서울에 올라온다. 안 의장은 “교수가 본업”이라고 말한다. 명함에 나란히 쓰인 ‘의학박사, 공학석사, 경영학석사’라는 긴 리스트는 벤처 창업을 위해 의대 교수직을 내던졌고 성공의 정점에서 또다시 홀연 유학을 떠났던 그의 끝없는 열정의 삶을 함축하고 있다. 안 의장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기업가 정신 1위 국가였다”며 “기업가 정신의 불씨를 되살리지 않는 한 한국 경제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기업가 정신’이라고 할 때 그 ‘기업가’를 대부분 ‘비즈니스맨’이라고 생각하지요. 여기서 큰 혼선이 생깁니다. 본래 ‘기업가 정신’은 ‘앙트레프레누어십(Entrepreneur ship)’을 옮긴 말이에요. 이때 기업가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앙트레프레누어’를 가리키지요. 사전을 찾아보면 ‘기업가’는 3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꾀할 기(企)를 쓰는 기업가(企業家), 바로 비즈니스맨을 옮긴 말이지요. 두 번째는 일어날 기(起)를 쓰는 기업가(起業家)죠. 뭔가를 새롭게 창조해내는 앙트레프레누어를 가리킵니다. 세 번째로 틀 기(機)를 쓰는 기업가(機業家)가 있는데 이건 직물업자를 말합니다.일본인들이 영어를 한자로 번역하면서 각각의 의미를 잘 살려 놓았는데 이걸 한글로 발음 나는 대로 쓰다 보니 차이가 사라졌어요. ‘기업가 정신’에서 ‘정신’도 좋은 표현이 아니지요. 영어 ‘십(ship)’은 내면적인 마음가짐이 아니라 그게 발현된 활동을 가리킵니다. ‘앙트레프레누어십’을 ‘기업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뜻을 거의 살리지 못한 나쁜 번역이지요. 차라리 ‘창업자 활동’이라고 하는 게 원뜻에 더 가깝습니다.저는 3가지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새로 기업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 기업에서 새롭게 가치를 만드는 일도 포함되지요. 두 번째는 자기 스스의 판단에 의해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말을 듣고 하면 진정한 기업가라고 할 수 없지요. 스스로 판단하고 그 리스크를 짊어져야 해요. 마지막은 꼭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가는 소유권을 함께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좋든 나쁘든 결과에 따라 손해도 보고 혜택도 받는 겁니다.몇 년 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5년 후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할지 앞이 안 보인다고 걱정하시는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대기업 총수로서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기가 어렵다는 말이지요. 중소·벤처 기업 시각에서 보면 그래도 5년 전에는 새싹들이 있었어요. 안철수연구소가 있고 다음과 NHN이 있어서 지금 이렇게까지 온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5년 후 그렇게 될 싹들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정말 심각한 위기입니다. 새싹이 자라지 않으면 경제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잘해야 지금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거죠.중소·벤처기업을 창업해도 성공할 확률이 너무 낮습니다. 게다가 기업가 정신을 결정적으로 질식시키는 것은 한 번 실패하면 평생 금융 사범이 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잘못된 구조입니다. 대표이사 연대보증이 가장 큰 문제지요. 기업을 그만두어야 할 때는 최고경영자(CEO)가 제일 잘 압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그럴 때 CEO가 주주총회를 소집해 주주들의 동의를 구하지요. 그런 과정을 통해 CEO는 다시 창업에 도전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기업을 접는 순간 기업의 빚이 전부 CEO 개인의 빚이 됩니다. 바로 대표이사 연대보증 때문이지요. 그러니 기업을 접을 수가 없어요. 이들은 당장 돈 되는 사업에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고 마구잡이 덤핑으로 업계를 초토화하는 ‘좀비’가 됩니다.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기업가 정신 1위 국가였습니다. 한국인들의 국민성이 굉장히 독립적이고 경쟁력이 강하고 대졸 인력이 세계에서 가장 많고 똑똑하다 보니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가 정신 지표가 거의 꼴찌예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튀는 사람들을 사회가 더 큰 힘으로 억누른 것이라고 봐요. 이렇게 된 건 분명히 사회와 정부의 책임이에요.대기업만 존재하는 경제가 얼마나 리스크에 취약한지는 1997년 외환위기 때 이미 입증됐어요. 국가 경제의 포트폴리오 측면에서 건실한 대기업 경제 옆에,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이 하나 더 튼튼하게 자리 잡으면 리스크에 굉장히 강한 경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중소·벤처기업은 고용 창출의 거의 유일한 수단이이지요. 과거 대기업에서 200만 명의 고용을 창출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130만 명으로 줄었어요. 게다가 대기업 고용은 앞으로 더 줄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나머지 4000만 명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중소·벤처기업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중소·벤처기업은 대기업의 성장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한국 상식으로는 구글 같이 워낙 크고 잘나가는 거대 기업이 있으니 미국에서는 새로운 인터넷 기업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실리콘밸리에 가서 보면 구글이라는 회사가 있기 때문에 그 아래서 수많은 인터넷 기업이 새롭게 탄생해요. 구글이 자선 단체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을 할까요. 새로운 인터넷 기업을 키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자신들의 정교한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흡수하고, 나가서는 인수·합병(M&A)을 통해 구글 스스로가 혁신 기업으로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세계적인 통계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90% 이상이 벤처기업에서 나오고 대기업은 10%가 채 못 됩니다.요즘 젊은 세대는 너무 안정 지향적이고, 너무 다른 사람 눈치를 많이 보고, 사치스러운 고민만 한다고 하는데 잘못된 선입관에 불과해요. 젊은이들의 모험심이 없어진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이 살아있는데, 문제는 기업가 정신을 억누른 사회가 똑같은 방식으로 젊은이들을 안정 지향으로 내몬 겁니다.1962년 부산 출생. 86년 서울대 의대 졸업. 91년 서울대 의학박사. 97년 미 펜실베이니아대 기술경영학 석사. 2008년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 98년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 95년 안철수 연구소 대표이사. 2005년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현). 2008년 카이스트 비즈니스 이코노믹스 프로그램 정문술석좌교수(현).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