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늘 ‘바쁘다’고 말할 정도로 시간이 없다. 교수나 시인, 작가 등 일부는 TV 출연이 잦아지면 단골 출연하기도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럴 경우 정작 학문 연구나 글을 쓰는 일은 뒷전일 경우가 많다. 인기를 좇다 그만 본업을 놓치기 쉬운 것이다. 그 까닭은 단순하다. 방송에 재미를 붙이면 시간을 그만큼 쏟아야 한다.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연구하고 글을 쓸 시간이 없다. 역설적으로 TV에 열심히 나오는 전문가들일수록 오히려 그들의 전문성은 떨어지는 게 아닐까.“한때 소양을 갖춘 학자였고 이후에는 꽤 큰 연구소의 소장도 맡았던 친구, 또 가까이 지내던 작가 두 사람이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높은 지위에 오르자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됐고 당연히 연구나 집필은 어려워졌다. 모두 나중에 의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때를 꿈꾸었고 그 시간이 오면 본업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자투리 시간에 책을 쓰거나 학문을 연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결국 그들은 자유를 얻었다. 고대했던 그 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더 이상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지 못하게끔 변해 있었다. 오랫동안 이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새로운 의무와 책임 등 온갖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그러다 첫 번째 친구는 술을 마시기 시작해 얼마 후 자살했다. 두 번째 친구도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세 번째 친구도 비슷했다.”이는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의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황소자리 펴냄)’에 나오는 한 토막의 에피소드다. 우리 사회에서 리더들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요약본을 읽거나 초청 강연으로 대체한다. 그런데 이들이 리더의 자리에서 물러나 시간이 많아지면 책을 읽고 더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세네카는 “우리는 삶의 대부분을 실수와 어리석은 행동으로 허비해 버리고 수많은 시간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흘려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거의 평생 동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만 하고 산다”라고 말했다.이 책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에 어울릴만한 책이다. ‘시간’이란 괴물과 꿋꿋하게 마주섰던 5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통계’ 노트를 작성하면서 ‘시간’을 마침내 정복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다.류비셰프가 시간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26세부터 매일 작성하기 시작해 82세로 죽기까지 56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시간통계’에 있었다. 일기의 형식을 띠었는데 책과 신문 읽은 시간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곧 시계를 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류비셰프는 ‘시계를 보는’ 불행한 삶을 자발적으로 택했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기록했다. 휴식 독서 산책 등에 소비되는 모든 시간을 계산했고 기록했다.류비셰프는 러시아 곤충학자로 곤충분류학 과학사 농학 유전학 식물학 철학 곤충학 동물학 진화론 무신론 등 경계를 넘나들며 지적 작업을 했다. 모두 70권의 학술서와 1만2000여 장에 달하는 논문과 연구 자료를 남겼다. 표본으로 만든 곤충만 1만3000마리에 이른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이면서 박학다식한 과학자였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생산적’ 독서 방식에 있었다.“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매우 꼼꼼하게 요점 정리를 해두는데 아직까지도 여전히 이런 작업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 결과 지금은 엄청난 자료를 보유하게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에 대해서는 요점 정리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관점에서 나름대로의 분석도 해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비 원고를 미리 가지고 있는 셈이어서 출판이 필요할 경우에는 이를 바탕으로 매우 신속히 원고를 집필할 수 있다.”그는 ‘자투리 시간’의 달인이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었는데 한 해 동안 문학작품을 무려 9000페이지 읽었다.(247시간 소요) 또 곤충을 채집하고 수학 문제도 풀었다. 그는 버스나 기차를 타는 시간, 회의 시간, 줄을 서 있는 시간조차 아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뜨개질하는 그리스 여인을 보고 이를 자신의 일에 활용했다. 그도 산책을 하면서 곤충을 채집했고 쓸데없는 잡담으로 채워지는 회의에 참석할 때에는 수학 문제를 풀었다. 물론 사람은 잠을 자야 하고 먹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시간이 있다. 이러한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약 12~13시간이 남는다. 바로 이것이 일을 하거나 학문을 연구하거나 인생을 즐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다.류비셰프에 따르면 성공적인 하루는 누구에게나 하루 12시간 정도를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는 사람들이 보통 하루에 14~15시간을 일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자신은 솔직히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한 적은 없다고 고백한다. 그가 하루 동안에 가장 많이 일한 최고 기록은 11시간 30분이라고 한다. 그는 보통 하루에 7~8시간만 연구해도 큰 만족을 느낀다고 말한다.그는 자투리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매우 세세한 계획을 세웠다. 여행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가벼운 책을 읽거나 외국어를 공부했다. 장기 출장을 할 경우에는 읽을 책을 미리 우편으로 부칠 정도였다.시간에 따라 읽을 책 종류도 달리했다. 먼저 아침에는 머리가 맑기 때문에 철학이나 수학 분야처럼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책들을 읽는다. 약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읽고 나면 조금 읽기 쉬운 역사나 생물학 방면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머리가 피곤해지면 가벼운 소설류를 보는 식이다. 버스를 탈 때에는 여러 상황을 고려해 두세 권을 가지고 탄다. 출발지 근처에서 타게 되면 앉을 수 있으니 책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기도 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서 버스를 타게 되면 서서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을 가지고 탔다.시간통계 방법은 단순한 시간의 수입 지출 기록을 넘어, 시간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분석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류비셰프는 단 한 번도 30분을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그는 취미 활동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왕성하게 했다. 그는 연말 결산을 하며 영화 연극 음악회 전시회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그는 생활 원칙 5계명을 정해 놓고 실천했다. 첫째, 의무적인 일은 맡지 않는다. 둘째,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 셋째, 피로를 느끼면 바로 일을 중단하고 휴식한다. 넷째,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다섯째,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적당히 섞어 한다. 누구나 실천해 볼 수 있을 것 같아 위안을 준다. 그는 매일 10시간을 자고도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류비셰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1분을 한 시간처럼, 한 시간을 하루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길고도 긴 시간이다. 많은 것을 읽고 여러 언어를 습득하고 여행하고 음악을 듣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시골과 도시에서 모두 살아보고 정원을 가꾸고 젊은이를 가르칠 수 있다.혹시 시간통계가 류비셰프에게 고통의 원천이 되진 않았을까. 그 역시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과 같은 평범한 삶, 분초를 계산하지 않고 그저 마음 편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과의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비셰프는 시간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편하게 살기 위해 매일매일 시간을 계산하며 생활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소중한 시간은 흘러가고 마는 것이다. 시간은 이를 활용하는 사람의 편이다.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채굴’해 사용한다면 누구나 류비셰프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시간이 없다, 바쁘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는 자기 능력에 맞춰 과제를 정하지 않고 과제에 맞춰 능력을 정했다. 위험을 회피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기보다는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류비셰프는 한 해의 시간이 결산이 끝나면 다음 해 계획 세웠는데 반드시 달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를 먼저 세워놓고 계획을 짰다. 여러분은 내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인가요?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는 한편 자녀경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5백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5백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 ‘아빠가 들려주는 경제 이야기 49가지’ ‘메모의 기술 2’ ‘한국의 1인 주식회사’ 등의 저서가 있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