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귀옥 권귀옥갤러리 대표

남산 자락에 있는 회현동은 서울의 이방지대다. 바로 코앞에 번화한 명동을 두고 있지만 회현동엔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과 낮은 담벼락이 끝없이 이어진다. 담쟁이덩굴이 덮인 일본식 2층집과 칼국수집 침술원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반면 대로변은 프라임타워(옛 아시아나빌딩) 등 고층 건물이 서있고 그 옆에는 첨단 주상복합건물 공사들이 한창이다.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이곳 골목 조금 안쪽에 권귀옥갤러리(권귀옥의 흙장난)가 있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으론 남산동에 속한다.갤러리에 들어서면 은은한 커피향과 함께 감미로운 올드팝이 흐른다. 가장자리 탁자엔 앙증맞은 도자기 예술 작품들이 놓여 있다. 벽에는 제법 큰 도자 작품들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걸려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 시리즈’를 비롯해 ‘고통의 길’ ‘가시밭길’ ‘해바라기’ 등이다. 콩알만큼 작은 모양을 수백 개씩 빚어 판 위에 얹어 초벌구이와 오랜 말림, 재벌구이를 거쳐 완성된 작품들이다. 1개 작품을 만드는데 1개월가량이 걸린다.이곳을 찾는 사람들마다 “아~흙으로 이런 것들도 빚을 수 있구나”라고 감탄한다. ‘곤드레 만드레씨와 부인’이라는 작품은 코믹한 표정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 갤러리의 권귀옥 대표는 자신의 작업을 “그냥 흙장난 수준”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몇 차례 전시회를 열어 관련 인사들로부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요즘도 경향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 중이며 몇 군데 갤러리에서 선보일 예정이다.이 권귀옥 대표가 바로 지난 1970년대 브라운관을 주름잡던 코미디언 ‘미스 권’이다. 작고한 ‘땅딸보’ 이기동 씨와 호흡을 맞춰 배고프던 시절 온 국민에게 웃음으로 배를 채워줬던 주인공이다. 그녀가 이 분야에 진출한데는 사연이 있다.부산 출신인 권 씨는 동래여고를 졸업한 뒤 1970년 MBC 탤런트 공채 2기로 TV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입사 동기가 박원숙 김자옥 씨 등이다. 김영애 김수미 씨보다는 조금 선배다.그녀는 코미디언으로 입사한 게 아니다. 탤런트로 들어와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순발력과 위트가 뛰어나 희극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희극배우가 되는 게 싫어 요리 빼고 조리 뺐지만 당시 코미디계의 대부였던 분이 당신은 코미디가 딱이니 그 길로 나가라고 엄명을 내려 1974년부터 이 길로 나서게 됐다.그녀는 “희극은 비극에 비해 훨씬 힘든 장르”라고 설명한다.“비극에 관한 연기는 신참도 소화할 수 있지만 희극은 비극을 마스터해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특히 인생의 고통을 겪어봐야 희극을 제대로 연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 보니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보브 호프와 같은 희극배우를 존경하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고 덧붙인다.당시 그녀는 늘씬한 몸매에 미모를 갖춰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희극배우는 대부분 뚱뚱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 나타난 새로운 스타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씨 등과 함께 출연했던 ‘웃으면 복이와요’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당대 최고의 프로였다.그녀는 부친이 부산일보 기자 출신이고 오빠도 언론사에서 화백으로 근무하는 등 언론과 인연을 맺고 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은 타고난 셈이다.많은 사람들이 희극배우는 삶도 유쾌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브라운관을 벗어나면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희로애락을 겪는다. 오히려 유명세 때문에 더 속앓이를 할 경우가 많다.그녀는 인기 절정이던 1980년대 중반 홀연히 브라운관을 떠났다. 결혼하러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다 실패한 뒤 딸 하나를 안고 조용히 돌아왔다. 미국에 있을 땐 주로 자원봉사를 하며 생활했다. 1997년 귀국한 그녀는 외환위기 직후 가정파괴와 더불어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은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수양부모들을 돕는 일에 나섰다.서울 정릉의 주말 캠프에 참가해 아이들 70명의 밥을 해서 먹이고 돌봤다. “제가 가지 않으면 아이들이 굶을까봐 걱정이 돼 한 번도 거르지 못하고 주말을 이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고 설명한다.그러던 중 문득 방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본 뒤 TV를 보니 이제 자신의 또래에 맞는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방송 3사를 기웃거렸지만 누구도 써주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젊은 스태프들도 많이 있었다. 당대의 스타가 이런 대접을 받다니 너무도 서글펐다. 여의도 KBS 부근에 있던 문화센터에서 지점토를 배우기 시작했다. “슬픈 감정을 삭이려고 지점토에 전념했지요.”이 분야에도 타고난 손재주가 있던 그녀는 이 경험을 살려 ‘종이 흙 입문’이라는 책을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이후 방향을 지점토 대신 흙 작업으로 돌렸다. 당시 인연을 맺은 한양대 모 교수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한양여대 내의 가마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줘 이 분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흙은 인간이 태어난 고향인데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라며 “흙을 빚으면서 힘든 시절을 잊었고 산고 끝에 태어난 작품을 통해 희열을 느끼곤 했다”고 술회한다.그녀는 청계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고 이를 ‘청계천 시리즈’라는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아울러 희로애락의 표정을 담은 사람들의 모습을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작품으로 빚어냈다.도예 작품은 정성이 많이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뜻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원인도 모른 채 중간에 깨지거나 터진다. 똑 같은 유약을 칠했는데도 원치 않는 색깔이 나오기도 한다. 그녀는 “흙 작업은 ‘불의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작품으로 나올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그녀가 갤러리를 연 것은 “50대와 60대를 위한 사랑방이 필요해서”라고 말한다. “이들 쉰세대는 청담동 카페에 들어가면 물 흐린다며 쫓겨나기 일쑤”라며 “이들이 커피 한잔하면서 느긋하게 대화를 나눌 공간이 필요해 이 공간을 만들었다”고 소개한다. 이곳에선 그녀의 작품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커피는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보기 힘든 고급 제품을 내놓으며 호주산 와인(그녀는 호주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도 맛볼 수 있다.대신 커피 값은 조그만 함에 재량껏 넣으면 된다. 이 함의 겉에는 ‘한국수양부모협회를 후원하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협회 후원자에겐 작품을 선물로 주기도 한다.권 대표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몇 년 전 아침 드라마 ‘여왕의 조건’에 주연보다 인기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뒤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수양부모협회 후원회장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한국이 선진국에 의해 아동 학대국으로 불리고 있는 사실을 아십니까.” 인터뷰에 답변만 하던 그녀가 느닷없이 송곳 같은 질문을 날린다.“한국처럼 많은 아이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키우는 고아원은 전쟁 국가 등을 빼곤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친부모가 형편이 될 때 되찾아갈 수 있도록 그때까지만 맡아서 키우는 수양부모제도가 훨씬 바람직하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10년이 넘게 수양부모협회를 돕는 까닭이다. 이런 활동 덕분에 자원봉사대상(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마당에 아동 학대국이나 고아 수출국이라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터뷰 말미에 겨울비를 맞으며 배웅하는 권 대표와 악수를 하니 그녀의 손은 농부의 손처럼 거칠었다. “도배하다 나와 풀딱지가 덕지덕지 붙어서 그렇다”고 익살을 부리지만 그녀의 손에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엔 언제든지 달려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돕는 세월이 묻어 있었다.약력: 1950년생. 68년 동래여고 졸업. 70년 MBC 탤런트(공채 2기). 76년 MBC 최우수 연기상(코미디 부문). 77~85년 MBC 라디오 ‘가요열차’ ‘싱글벙글쇼’ 등 진행. 98년 도예 활동 시작. 2006년 도예 첫 개인전. 사단법인 한국수양부모협회 후원회장(현).수상: 자원봉사대상(국무총리상) 저서: 종이흙 입문(공저).〈 갤러리 개요〉창업: 2008년소재지: 서울시 중구 남산동 1가 16-6그랜드필드 빌딩 1층주요 작품: 도자기 공예(청계천 시리즈,고통의 길, 해바라기, 곤드레 만드레씨와 부인, 춤추는 요정 등)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