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아시아나 그룹의 일원이 된 국내 최대 물류기업 대한통운(왼쪽)과 삼성전자가 인수를 추진했던 샌디스크 미국 본사.올 초 재계는 인수·합병(M&A)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포스트 외환위기’ 10년을 마감하는 마지막 초대형 매물의 공개 매각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금호아시아나가 대한통운을 손에 넣으며 포문을 열었다. 인수전에 뒤늦게 뛰어든 한화는 대우조선해양을 낚아채 드라마틱한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하반기 글로벌 금융시장을 얼어붙게 한 미국발 신용 경색과 주가 급락으로 ‘대어’ 낚기에 혈안이던 기업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2008년 재계의 M&A 성적표, M&A로 엇갈린 운명을 살펴본다.‘최근 재계의 M&A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열풍’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한두 기업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대기업, 중견 기업을 막론하고 M&A를 올해 최대 화두로 꼽는다. 많은 기업이 앞 다퉈 전담팀을 꾸리고 인수 대상 기업 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웬만한 ‘리스크’는 개의치 않을 기세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한경비즈니스 632호)올 초 한경비즈니스는 재계에 부는 M&A 열풍을 이렇게 전했다. 당시 주목받는 매물로 꼽힌 곳은 대한통운 현대오일뱅크 현대건설 하이닉스 대우조선해양 쌍용건설 대우일렉트로닉스 현대종합상사 쌍용양회 등 9개였다. 이 가운데 실제 매각이 끝나 새 주인이 정해진 곳은 대한통운과 대우조선해양 2개뿐이다. 대한통운은 금호아시아나그룹(1월)이 인수했고 대우조선해양은 한화그룹(10월)이 가져갔다. 일부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인 곳도 있지만 나머지 매물은 대부분 아직 매각 공고도 못낸 상태다. ‘소문만 요란한 잔치’였다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하지만 2008년은 확실히 ‘M&A의 해’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초대형 메가 M&A 움직임이 줄을 이었다. 해외 글로벌 리딩 기업도 인수 대상에 올랐다. 지난 8월 삼성전자는 세계 1위 플래시 메모리카드 업체인 미국 샌디스크 인수를 선언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회사의 주식을 주당 26달러에 전량 현금으로 사들이는 58억5000만 달러(약 8조 원) 규모의 초대형 베팅을 감행한 것이다. 국내 기업의 해외 기업 M&A 사상 최대 규모였던 두산의 밥캣 인수(48억 달러)보다 10억 달러 이상 큰 규모다.샌디스크 인수 추진은 1994년 미국 PC 업체 AST 인수 실패 이후 보수적 전략을 고수해 온 삼성전자가 글로벌 M&A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샌디스크 측과의 가격 협상 난항, 환율 급등 등으로 10월 말 공식적으로는 인수 제안을 철회한 상태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 삼성전자의 엄청난 현금 동원력도 관심을 끌었다. 샌디스크는 삼성전자가 플래시 시장의 지배자로 올라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발판이다.LG전자도 1995년 미국 가전 업체 제니스 인수 후 13년 만에 M&A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LG전자가 눈독을 들인 곳은 분사 후 매각을 추진 중인 제너럴일렉트릭(GE)의 가전사업부였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조명 회사를 모태로 성장한 100년 역사의 미국 토종 기업이다. 미국 내 시장점유율 2위 업체이기도 하다. 지난 5월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GE 가전 매각 절차를 예의 주시 중”이라며 인수설에 불을 댕겼다.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도 “LG전자가 가장 강력한 인수 후보 중 하나”라고 화답해 분위기를 띄웠다. GE 가전을 인수하면 LG전자는 월풀, 일렉트로룩스를 제치고 단숨에 세계 1위 가전 업체로 도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 후속 조치가 없어 단순한 ‘검토’ 차원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최근 LG전자와 GE 가전 담당자들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인수설이 재부상하고 있다.올해 금융권도 M&A 열기에 휩싸였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였다. 지난해 불거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사태는 세계 선두 투자은행을 사들일 수 있는 ‘백년 만의 기회’를 제공했다. 산업은행은 8월 뉴욕에서 리먼브러더스라는 초대형 대어를 낚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 선진화’, ‘글로벌 투자은행 육성’이 금융권의 지상 최대 과제였던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만 했다. 리먼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지낸 민유성 신임 산업은행 총재가 인수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긴급 자본 확충이 필요해진 리먼브러더스의 지분 25%를 사들이는 방식이 논의됐다. 인수 금액만 최대 6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하지만 초읽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던 리먼브러더스 인수는 가격 협상 난항, 인수 파트너로 거론된 주요 은행들의 불참, 금융 당국의 반대 등으로 논란만 남긴 채 무산됐다. 9월 10일 산업은행은 인수 포기를 공식 발표했다. 그로부터 꼭 5일 뒤인 10월 15일 글로벌 금융시장을 주무르던 거인 리먼브러더스는 파산을 신청했다. 많은 사람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리한 인수 추진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후폭풍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유명 글로벌 금융회사를 인수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이러한 뜻밖의 ‘메가 딜’들은 M&A 열풍을 한껏 달아오르게 하는데 기여했지만 실제 성사되지는 못했다. 올해 매각된 기업 중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대한통운과 대우조선해양이다. 두 건 모두 인수 과정에서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인 드라마가 연출됐다.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 1월 국내 최대 물류 기업인 대한통운을 손에 넣었다. 2006년 국내 최대 건설사인 대우건설 인수에 이은 ‘연타석 홈런’이었다. 무려 10개 기업이 뛰어들어 대한통운을 노렸지만 최종 입찰에는 금호아시아나와 한진그룹, STX, 현대중공업 등 4개 그룹만 참여했다. 인수자 선정 발표 직후 금호아시아나 관계자들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할 만큼 쟁쟁한 경쟁자들이었다. 금호아시아나의 준비는 치밀했다. 임직원 고용 보장, 인수 후 시너지 효과 등 비가격적 요소에 공을 들였던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왔다.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금호아시아나는 상반기 내내 금융시장에 확산된 유동성 위기설과 씨름해야 했다. 문제의 발단은 2006년 대우건설 인수 당시 재무적 투자자(FI) 유치를 위해 제시한 ‘풋백옵션(자금을 빌려주고 일정 시점에 특정 주가로 되팔 수 있는 권리)’이었다. 대우건설의 주가 폭락으로 재무적 투자자들이 이때 받은 풋백옵션을 행사할 경우 4조 원 이상의 현금이 필요한 상황으로 분석됐다. 대우건설은 대한통운 인수에 핵심 계열사가 참여해 중심적인 역할을 한 곳이기도 했다. 대한통운 인수자금 4조1000억 원 중 절반 가까운 1조6477억 원을 자체자금과 교환사채 발행, 대출 등으로 대우건설이 조달했다.4조 원대가 넘는 대한통운 인수 자금도 부담이 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한통운 인수를 위해 대우건설과 아시아나항공 등을 차입 주체로 해 은행권에서 1조 원대의 자금을 대출받았다. 유동성 위기설로 계열사 주가가 연일 하락하자 금호아시아나는 7월 말 고강도 종합 대책을 내놓았다. 계열사의 보유 지분 및 부동산 매각 등으로 4조5740억 원의 유동성 자금을 마련한다는 내용이었다. 금융 계열사인 금호생명도 매각하기로 했다. 가장 주목할 것은 대한통운에 대한 유상감자다. 회사의 자본금을 줄이고 이를 주주들에게 돌려주는 방식이다. 금호아시아나는 내년 상반기 대한통운에 대한 3조6000억 원대의 유상감자를 실시할 예정이다. 금호아시아나가 유상감자로 받는 2조 원대의 자금은 은행권에서 빌린 대출금 상환에 쓰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유동성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이런 복잡한 논란이 계속 이어졌지만 새로 금호아사아나그룹의 상징인 ‘날개(Wing)’를 단 대한통운은 올해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며 선전했다. 올해 대한통운은 매출 2조 원, 영업이익 1000억 원 이상을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육·해·공을 아우르는 복합 물류 전략도 가시화되고 있다. 첫 단계로 대한통운 내에 해운팀을 신설해 해운 사업 육성에 본격 착수한 것이다.두 번째 M&A 드라마의 주인공은 한화그룹이다. 지난 10월 한화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세계 3위 조선 업체인 대우조선해양의 새 주인이 됐다. 올 초만 해도 한화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월 초부터 거론되기 시작한 유력 인수 후보 리스트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언론도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는 세계 4위 철강기업 포스코와 세계 최대 조선 업체인 현대중공업에만 주목했다.결전이 임박한 10월 초까지만 해도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은 포스코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10월 10일, 경쟁 관계이던 포스코와 GS가 공동 컨소시엄 구성을 전격 선언하면서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경쟁 구도는 ‘포스코·GS, 현대중공업, 한화’의 3파전이 됐다. GS를 우군으로 끌어들인 포스코의 일방적인 승리가 예상됐다. 하지만 본입찰 마감일인 10월 13일 또 한 번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GS가 포스코와 구성한 컨소시엄을 깬 것이다. 매각 주체인 산업은행은 우선협상대상자 발표를 연기하며 이 사상 초유의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장고에 들어갔다. 10월 24일 결국 산업은행은 단독 입찰을 강행한 포스코의 입찰 자격을 박탈하고 한화를 우선협상대상자로 발표했다.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확신하고 있던 포스코는 링에 오르지도 못하고 말았다. 2004년 한보철강(현 현대제철) 인수 실패 이후 두 번째 고배를 마신 셈이다. 컨소시엄이 깨진 결정적인 이유는 입찰 가격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 의지가 큰 포스코는 안전하게 높은 가격을 쓰려고 했지만 GS는 난색을 나타냈다. 5 대 5 동등 지분 방식이었던 때문에 타협은 쉽지 않았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포스코와 GS의 컨소시엄 구성 소식을 듣고 “합작이란 게 쉬운 게 아니며 양측이 인수 가격에 합의하거나 입찰가를 높게 쓰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견했다고 한다.그러나 한화와 포스코의 주가는 거꾸로 움직였다.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승리의 주인공이 된 한화는 주가가 하락한 반면 탈락한 포스코는 오히려 인수 부담에서 벗어나 주가가 상승세로 돌아섰다. 하반기 들어 자금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6조 원대의 인수 자금 마련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저지로 아직 실사에도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한화는 대한생명 지분과 보유 부동산 매각 등을 추진 중이다. 시장에서는 ‘갤러리아 백화점 매각설’도 흘러나온다.최종 단계까지 갔던 쌍용건설 매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난 7월 쌍용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던 동국제강은 12월 초 매각 주간사인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인수 가격 인하와 대금 납부 유예를 요청했다. 입찰 당시 2만 원 안팎이던 쌍용건설 주가가 6000원대로 급락한데다 건설 경기마저 불투명하다는 이유였다. 캠코는 이러한 요구를 ‘말도 안 된다’며 거절했고 동국제강은 계약 보증금으로 낸 240억 원을 포기하면서까지 인수 포기를 선언하는 강수를 뒀다.올해 기대 매물로 꼽혔던 현대건설 하이닉스 현대오일뱅크 대우인터내셔널 현대종합상사 쌍용양회 등은 매각이 내년 이후로 미뤄졌다.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최근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상당 기간 시장에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미국발 금융 위기와 경기 침체로 그동안 M&A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꼽히던 기업들은 올해 그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맞고 있다.M&A 시장에는 수조 원대의 ‘빅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올해도 기업들은 수많은 기업을 사고팔았다. 미국 최대 경매 업체인 이베이는 지난 5월 G마켓을 인수하기로 하고 인터파크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후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조건부 승인’까지 얻었지만 본계약은 해를 넘기게 됐다. 이베이는 이미 국내에 자회사 옥션을 갖고 있어 G마켓을 인수할 경우 오픈마켓 시장점유율이 90%에 육박하게 된다. 홈플러스는 홈에버를 인수했고 한라건설은 만도를 되찾았다.취재=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