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 문화의 저력

세계경제 위기로 올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추운 겨울이 될 전망이다. 올겨울만이 아니라 앞으로 1~2년간은 지독한 불황을 견뎌내야 한다.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무풍지대’처럼 여겨졌던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유럽 신흥국이 미국발 금융 위기에 직간접으로 휘말려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일본도 실물경제 악화의 타격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세계 동시 불황의 파고 앞에서 벌써부터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 가혹한 은행 구조조정, 기업 구조조정 등의 뼈아픈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일본에선 구조조정의 공포만큼은 상대적으로 적은 게 분명하다. 일본도 1990년대 초 거품 경제 붕괴 후 10년간의 길고 긴 불황을 겪었지만 한국이 외환위기 직후 당했던 것과 같은 생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구조조정은 없었기 때문이다.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꼽히는 게 일본의 ‘상생 문화’다. 전통적인 일본의 기업 문화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경쟁 문화가 아니다.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상생의 문화가 일본 기업에 뿌리 내려 있다. 노사 관계도 하청 업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같은 상생 문화가 있기 때문에 찬바람 쌩쌩 부는 글로벌 불황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과 일본인들은 다른 나라보다 덜 떨고 있는지 모른다.=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로 떠오른 일본의 도요타자동차. 이 회사의 글로벌 경쟁력을 얘기할 때 빼놓은 수 없는 회사가 있다. 덴소라는 자동차 부품 기업이다. 도요타는 태평양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장이 많은 차’의 대명사였다. 1949년 당시 부품사업부였던 덴소가 독립 기업화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쌓으면서 도요타의 경쟁력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또한 덴소가 연매출 25조 원의 세계 최고 자동차 부품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는 도요타의 공정한 파트너십이 있기에 가능했다.일본 대기업들은 부품 중소기업과의 상생을 기업 경영의 핵심 전략으로 삼은 지 오래됐다. ‘경쟁력 있는 부품 없이는 경쟁력 있는 완제품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대표적인 모범 사례가 바로 도요타다. 도요타는 2000~03년 중 30%의 원가 절감을 추진하면서 거기서 나온 추가 이익을 부품 업체의 납품 단가 인상 등으로 철저히 공유했다. 도요타자동차 관계자는 “부품 업체에 1000엔짜리 부품을 800엔에 만들어 오라고 하는 건 진정한 원가 절감이 아니다”며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부품을 만들어 줄 것을 주문하는 게 도요타 방식”이라고 소개했다.도요타에선 협력 부품 업체가 다른 대기업과 납품 거래를 하는 것도 자유롭다. 덴소도 창립 초기부터 도요타 이외의 기업에 부품을 납품했다. 그만큼 서로 믿는다는 얘기다. 상생 경영 연구를 위해 도요타를 방문했던 이종욱 서울여대 교수(경제학)는 “가장 바람직한 상생 협력의 모델은 공정한 거래와 성과 분배로 구축한 신뢰를 통해 비전과 철학까지 공유하는 형태”라며 “도요타의 협력 업체들은 도요타의 비전과 경영 철학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도요타가 장기 거래한 부품 기업 530여 개사에 지분 투자를 하고 있는 것도 신뢰가 바탕이다.도요타뿐만 아니다. 일본경제조사협회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 9대 자동차 메이커의 390여 개 부품 회사 가운데 30대 부품 업체는 58.5%가 대기업으로부터 자본 출자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 자동차 산업 초창기에 완성차 메이커가 부품 생산 업체에 경영 기술과 인력을 파견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본 참가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도요타에 전장 부품을 납품하는 알프스전기의 가타오카 마사타카 대표는 “도요타의 똑같은 기술진이 우리 회사뿐 아니라 경쟁 회사에도 나가 기술 지도 등을 하지만 회사 기술 정보가 경쟁사로 새나갈 수 있다고 걱정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도요타를 믿는다”고 말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지난 50여 년간 노사분규가 한 번도 없었던 회사로 유명하다. 1950년 경영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조가 파업했다가 전체 근로자 중 25%가 감원됐던 아픈 경험 이후 도요타에선 ‘파업’이란 단어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조합원비의 5%씩을 적립하는 도요타 노조의 쟁의 기금은 현재 100억 엔(약 800억 원) 넘게 쌓여 있다.지난 2003년 임금 교섭 땐 회사 측이 사상 최대의 계속사업이익을 얻어 임금 인상을 고려했지만 오히려 노조가 “국제경쟁력 저하가 우려된다”며 거부했던 일화도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1987년 창립 이후 단 한 해만 빼고 20년 연속 파업을 한 기록과 대조적이다.이런 노사 화합이 도요타자동차의 경쟁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미국과 한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노조 파업으로 허송할 때 도요타 근로자들은 가이젠(改善) 등 혁신을 통해 원가를 줄이고 생산성을 높여 왔다.도요타의 노사 화합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건 이 회사의 ‘한솥밥 식구’ 의식이다. 아이치현 도요타시에 있는 도요타자동차 본사 2층엔 임직원 식당이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본사는 물론 모토마치 타카오카 등 주변 공장의 임직원들도 찾아온다. 쇼이치로 명예회장과 와타나베 가츠아키 사장도 본사에 있을 땐 점심을 먹기 위해 이 식당을 찾는다.식당 가득히 쭉 늘어선 4인용 식탁 위엔 각각 둥그런 목제 밥통이 놓여 있다. 반찬은 몰라도 밥은 각자 퍼 먹도록 돼 있는 것. 모두가 ‘한솥밥 먹는 식구’라는 의식을 은연중에 심어주기 위한 아이디어다.‘한솥밥 식구’ 의식은 도요타 특유의 화합과 상생 문화의 배경이기도 하다. 종신 고용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기업에선 조직 결속력이 강하게 마련이지만 도요타는 특히 두드러진다. 종합 기계 산업인 자동차 업종의 특성상 개인기보다는 협력과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업 문화 자체가 그렇다. 너와 나보다는 우리를 강조하는 게 회사 풍토다.전 직원들이 종으로 횡으로 엮여 있는 사내 모임이 활성화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요타엔 부장, 과장, 계장, 기능직 사원 등 직급별로 친목회가 결성돼 있다. 기숙사생 모임, 향우회, 동창회, 동호회 등도 많다. 최근 비정규직이나 파견 사원 등이 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긴 했지만 지난 2002년까지는 학력별 모임도 있었다.이렇게 다양한 모임들로 인해 도요타 직원들은 씨실과 날실처럼 짜여 있다. 자연히 인간관계의 유대감이 깊다.도요타의 회사 소개 자료에는 사내 단체의 목적을 이렇게 적고 있다.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자기 계발에 힘씀과 동시에 회사 발전에 기여한다.’ 회사 내 직원들이 공적, 사적 관계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노와 사로 나뉘어 반목할 틈이 없다.와타나베 도요타자동차 사장은 “나는 노사란 생각을 하는 것조차 싫어한다. 한솥밥 먹는 처지니까 되는 것, 안 되는 것을 확실히 말해야 한다. 그래서 신뢰와 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인재 정보 회사인 디스코의 가토 히로시 회장은 “일본 기업의 경쟁력은 종신 고용 등 특유의 일본식 경영에서 나온다”며 “도요타처럼 직원들을 한 식구처럼 생각하는 상생의 경영 방식이야말로 노사 화합의 바탕이 되고, 그것이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차병석·한국경제 도쿄 특파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