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 건강한 아웃사이더들

‘프로축구 최하위 가난한 시민 구단, 전·후기 통합 1위와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거머쥐다.’ 2005년 K리그에서는 드라마 홍보를 위한 과장된 카피와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진 바 있다. 주인공은 인천 유나이티드FC였고, 그 중심에는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장외룡 감독이 있었다. 짜릿한 드라마를 만든 장 감독은 2007년에 홀연 영국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다시 돌아온 장 감독은 2008 K-리그에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목표로 했고 아쉽게 6강 앞에서 멈춘 후 겨울 휴가를 맞이한 참이다.“시즌 내내 데드라인으로 정한 6위권에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선수 구성이 바뀌면서 무너졌던 팀의 밸런스를 회복했다고 봅니다. 마지막에 난적을 만났지만 지나온 과정에 대한 판단과 자신감은 변함이 없습니다.”남보다 잘해야겠다는 오기보다 자신의 목표에 집중하는 장 감독의 스타일은 한국의 축구감독들에게 품었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그는 2005년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때에도 자신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코치진과 스태프, 선수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며 겸손함을 유지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남다르다. 축구선수 출신으로 다져진 체격을 30년 동안 유지해 온 데다 빨강 티셔츠와 청바지에 가죽 재킷까지 걸쳐 멋을 낼 줄도 아는 베스트 드레서다.하지만 장 감독의 가장 특출한 점은 겉이 아니라 속에 담긴, 축구 교육에 대한 지론이다.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선수들은 단체 생활을 하느라 수업에 빠지기 일쑤이지만 장 감독은 학교 공부에 충실해야 하고 연습할 때 모여도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꼭 필요한 기술 훈련을 하는 시간 외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초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선수들에게는 사생활과 플레이 양쪽 모두에서 ‘기본’을 지키라고 말한다.“어린 선수들이 공만 차거나 바스켓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걸 보면 안타까워요. 약간 재능이 보인다고 모두 스타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톱스타들도 마찬가지예요. 중등부에서 대학부까지 에이스라는 소리를 들으며 귀한 보석처럼 보호받다가 막상 프로가 되어 스스로 결정해야 할 때엔 제대로 헤쳐 나갈 수가 없게 되는 거죠.”지도자로서 철학, 선수들을 대하는 태도, 취재진과 팬에 대한 배려 등 장 감독 특유의 스타일은 해외에서의 경험이 빚어낸 것이다. 그는 10년 가까운 기간을 일본에서 플레잉 코치와 감독을 하며 보냈다. J-리그 출범 과정을 지켜보면서 조만간 일본이 한국을 따라오겠다는 것을 감지했고 지도자 준비는 오랜전부터 계획한 것이기도 했다.선수 시절 장 감독이 남긴 일화들은 또 한 편의 드라마다. 경성고 2학년 시절만 해도 득점상을 받았을 정도로 장 감독은 원래 뛰어난 공격수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니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 1학년생이 주전으로 낄 틈바구니가 없었다. 딱 하나 빈 자리가 왼쪽 수비수였고 그 자리를 잡기 위해 오른발잡이인 그는 왼발 킥과 슈팅 연습을 하루 200~300개씩 했다고 한다. 대우 로얄즈에서 왼쪽 풀백으로 활약하던 모습에는 남모를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선수들에게는 나처럼 노력하지 않는다고 타박하지 않아요. 나는 나일뿐이고 나밖에 모르면 내 안에 갇히게 되지요. 그냥 주변에서 나를 보고 느끼고 배웠으면 좋겠어요. 저는 축구 훈련을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축구 교육을 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저래도 되네.’ 장 감독은 이런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한국 축구계에서 장외룡 스타일의 축구가 성공할 수 있고 장외룡과 같은 지도자도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앞으로 국가대표 감독과 유소년 축구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장 감독이 만들어 갈 신화는 이제 시작이다.경제, 경제, 경제! 여기저기 경제 문제로 시끄러운 때 철학 이야기를 하러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을 찾았다. 이 원장은 교수(서강대)라는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와 평소 소신에 따라 철학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이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가능한, 철학과 경제가 만나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당장의 경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갈래와 우리가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한 윤리적인 근거를 찾는 갈래가 함께 가야 합니다.”이정우 원장은 자동차 ‘빅3’으로 불리는 GM, 포드, 크라이슬러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지난 11월 구제금융을 요청하러 가는 청문회 자리에 전용 제트기를 타고 간 것을 윤리 실종의 일례로 들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윤리는 개인의 덕목이 아닌, 구조에 대한 반성이지만 말이다. 그가 보는 현 위기의 원인은 욕망이다.“개인의 조절되지 않은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하지 않고 가다가 이런 사태가 온 거죠. 돈이 있어야만 욕망이 실현되는 건 아니잖아요. 개인의 욕망을 배분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왜 내가 이렇게 됐는지 전체 구조를 생각해 봐야지요.”자산이 반 토막 나고, 수입은 줄어들고, 일자리마저 찾기 힘들어 하루하루를 급급해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구조를 뜯어보려 할지 걱정이 된다. 이 원장은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떨어져 끝없이 생각하는 일, 철학자 되기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한 발짝 떨어져 생각하지 않으면,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사회의 작동 절차에 다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길게 봐야지요. 일본인들은 폭격이 일어날 때도 연구자들을 따로 대피시켜 미래를 준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빨리 결과를 내놓으라고 독촉하지 않고 기다리며 지원한 결과가 오늘날 일본의 노벨상 수상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그의 책 가운데 ‘탐독’은 이 원장의 개인사와 문학, 과학, 철학 분야의 책들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어서 흥미롭다. 철학 입문자들에게는 특별히 철학의 기본 개념을 알 수 있는 ‘개념-뿌리들’이라는 책을 추천해 줬다.“수학은 초등학교 때 사칙연산에서 시작해 인수분해, 미적분까지 단계적으로 배우잖아요. 철학도 기초부터 배워가며 접하면 전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자기와 관련 있는 분야에서 시작하세요. 법철학, 정치철학, 존재론, 인식론 등등 철학도 분야가 많습니다.”이 원장은 요즘 경제학자와 함께 경제와 철학을 잇는 공동 작업을 하고 있다. 경제철학이라는 말이 어딘가 낯설지만, 시스템을 재검토하고 경제활동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기에 더없이 결정적인 이 시기에 꼭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또 내년은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든 철학아카데미가 1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이를 기념할 만한 작업들도 쌓여 있다. 당위와 존재 사이의 간격은 멀지만 자석과 같은 힘을 가지고 이상이 현실을 끌어당기기를 바란다는 철학자의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공교롭게도 이 원장을 만난 날 포드의 CEO가 다음 번 연방 상원 청문회에는 자동차를 타고 가겠다고 공언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쇼가 아니길 진지한 자기반성의 시작이기를 바라게 된다.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를 인터뷰하기 전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채 국회 본관에서 정부 관료들을 향해 호통 치는 모습이었다.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고 조금만 잘못해도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 어릴 적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하지만 이러한 편견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서민들의 고통과 눈물을 나의 눈물로 가질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새벽 5시 눈 뜨자마자 1시간의 명상 시간을 갖는다는 강 대표는 인자하고 따스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았다. 하지만 최근 현안이 되고 있는 쌀직불금 부당 수령 문제가 나오자 자연스레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쌀직불금 제도가 만들어지던 2005년부터 저는 잘못된 법이라고 끊임없이 반대했죠. 하지만 그동안 정부는 계속 거짓말만 늘어놓다 결국 이번에 국정감사를 통해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직불금 수령자 명단을 명확히 공개하면 됩니다. 적법하게 받았다면 큰 죄가 아닌 것이고 만약 부당하게 받았다면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지면 됩니다. 명단을 공개하지 않으면 누가 부당하게 수령했는지 여부조차 가릴 수 없지 않습니까.”쌀직불금 문제와 관련해선 목소리를 높이는 그이지만 진보 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의 현재 위상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아 보였다.“‘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정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우리 민노당이 출발했지만 국민들에게 우리 기대만큼 다가가지는 못한 것 같아요. 워낙 소수 정당이라는 한계도 있는데다 우리나라 국회는 교섭단체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습니다.”강 대표는 국민들이 민노당을 지나치게 데모만 일삼는 당으로 보는 것도 안타깝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등 홍보 활동이 미흡했다는 점은 솔직하게 인정했다.물질만능과 경쟁, 인성 상실의 시대에 강 의원이 지향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 위해 살지요. 돈은 행복해지기 위한 한 수단일 뿐인데 사람들은 돈에만 혈안이 돼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땀흘려 정직하게 일하고 돈 버는 사람을 무능하게 여기고 투기를 하든 뭐를 하든 돈만 잘 벌면 유능한 사람이라고 보는 그릇된 풍토가 우리사회에 퍼져 있습니다. 남은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상생을 나누는 사회가 정말 행복한 사회 아닐까요.”그의 의원회관 227호는 현재 사무실이자 집이기도 하다. 의·식·주를 모두를 이곳에서 해결한다. 살던 집 전세금은 18대 총선자금에 들어갔다. 장기 투숙이 어느새 1년이 넘었다.어떻게 살까 싶은 데 그는 정작 “출퇴근 시간이 단축돼 좋다”며 웃는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전기장판을 오래 쓰다 보니 피로가 누적됐다는 점이다.그는 새벽에 일어나 명상과 함께 도포와 저고리를 직접 다림질한다. 옷을 다리며 스스로의 정신 자세를 다잡는 시간이기도 하다.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그는 오늘날 사랑의 실종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예수님 가르침의 가장 핵심이 사랑입니다. 내가 중요한 만큼 남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배려하고 끌어안고 함께 눈물 흘려 줄 수 있는데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의 인생관 중 하나는 ‘갑(甲)으로 살자’다.욕심 내지 않고 성급하지 않게 천천히 목표점을 향해 가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하지만 지난 2007년 7월부터 그가 3개월간 맡았던 의사협회 대변인 자리는 그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다른’ 일이었다. 애초 비주류를 지향했던 그가 대변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당시를 회상하며 박 원장은 “처음부터 오래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3개월이나 6개월만 맡겠다고 미리 말했습니다. 생각보다 시기가 빨라졌지만 계획대로 움직인 겁니다”라고 말했다.지금은 ‘주식 전문가’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도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은 실패만 맛보았다고 한다. 한국 기업에 맞지 않는 미국식 투자론을 적용한 것을 깨닫고 1990년대 중반부터 투자 방법을 바꿨다. 이 무렵 외환위기를 예측하는 글을 썼고 이 예측이 적중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각종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이후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시골의사의 주식투자란 무엇인가’ 등 저서들이 히트를 치면서 본업인 의사보다 주식전문가로 더 이름을 날리게 됐다.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즐겨했다는 그는 요즘도 한 달이면 수십 권의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읽는 재주 못지않게 그에게는 쓰는 재주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전국 규모의 창작 대회에서 소설 부문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그런 그도 요즘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는 ‘빚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부채는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부채가 없고 순수 자산으로 주식만 갖고 있는 사람은 분산 투자를 하고 현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산의 적정 비율을 주식에 투자해도 됩니다. 자기 상황에 맞게 해야 하는 것이죠. 절대로 빚내서 투자하지 마십시오. 저는 신용카드 할부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차를 살 때도 그렇습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빚은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거든요.”그는 주식 투자서를 펴낸 것에 대해 “주식 투자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한국 경제 전망에 대해선 그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그는 “우리나라의 최대 문제점은 부동산 거품과 가계 대출로 부동산이 연착륙하지 않으면 큰 위기에 빠질 것이고 최대 고비는 내년 2~3월로 예상된다”고 말했다.그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도 강하게 비판했다. 박 원장은 “정부 정책은 서민들을 위한 대책이 돼야 한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쳐서는 안 된다”며 “부자들 주머니로 돈이 들어가 봐야 시중에 결코 돈이 돌지 않는다. 1억을 부자에 주면 1000만 원 정도만 소비하지만 가난한 사람 100명에게 주면 1억 원을 다 소비하게 된다”고 말했다.장사익. 이 사람을 무어라 칭하면 좋을까. 가수? 뮤지션? 노래하는 시인…? 그래도 역시 소리꾼이라는 말이 제일 적당할 것 같다. 가수나 소리꾼이나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지만 역시 어감이 다르다. 영혼을 깨우는 노래, 이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이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마흔여섯 살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소리꾼이 되기 전까지 25년 동안 직종만 15가지를 넘게 바꿨다.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카센터 직원이었다. 그래도 소리꾼이 된 후로 지금껏 직종 변경 없이 15년 세월을 무대에서만 보냈으니 그의 말대로 이제 그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꽃을 피우게 마련입니다. 겨울부터 움을 틔워 봄이 되자마자 활짝 꽃을 피우고 일찍 져버리는 꽃도 있지만 국화처럼 오래도록 기다리다 가을에야 겨우 피는 꽃도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국화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꽃도 늦게 피었으니 그 향기가 오래오래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요즘 같은 불황에도 그의 공연은 전국 어딜 가나 전석 매진 행렬을 계속한다. 그는 그저 목청 좋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아니다. 그랬으면 그저 그런 가수로 반짝했다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노래에는 언제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노래 한 곡을 짓기 위해 들이는 공 중에 좋은 노랫말이 될 만한 시를 찾는 것이 90%를 차지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곡을 붙인 노래에는 주옥같은 시가 많다. 스스로 시인들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것도 고결한 언어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인들의 아름답고 진실한 말들을 감사히 받아서 쓰고 있다고 말한다. 겸손 아닌 겸손이다.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이는데 비싸고 좋은 음악 장비가 필요한 것도, 정해진 형식과 규칙이 있는 악보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시가 가슴에 와 닿으면 그 시어들은 가슴에 울림을 만든다. 그 울림이 가슴에서 목으로, 곡을 붙여 나온다.세검정 뒷길, 그의 집 통창 너머에는 고즈넉한 인왕산이 한눈에 보인다. 인왕산 자락을 가슴에 안고 뽑아 올리는 그의 노래는 마른 가슴에 내리는 겨울비처럼 촉촉하고 뜨겁다. 그의 노래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소통하는 것이다. 나이 먹고, 고단하고, 아픈 이들이 장사익의 노래에 끄덕끄덕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의 노래가 그들 삶의 또 다른 기록이자 살아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장사익의 노래는 시대를 넘는다. 장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 늦은 나이에 아마추어로 배우기 시작했던 태평소에 신명이 들려있을 무렵, 시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서태지와아이들의 2집 ‘하여가’ 라이브 무대마다 그의 태평소 소리가 신명나게 울려 퍼졌다. 서태지의 무대였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장사익이기에 가능한 무대이기도 했다.“얼마 후 지금보다 컴퓨터 속도가 열 배는 빨라지는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보다 열 배는 더 행복해질까요. 휴대전화가 없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보다 지금 우리는 몇 배 더 행복한 걸까요. 오히려 마음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는 마음만 늘지 않았나 싶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계절은 그렇게 오고 갑니다. 사람은 변했지만 계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계절도 그렇게 천천히 오고, 또 가겠지요. 사람의 인생에 꽃피는 시절을 컴퓨터가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지금 그의 작은 소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남을 수 있는 노래 하나를 제대로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나이가 좀 더 먹어 70세가 되고 80세가 되고 90세가 되었을 때 그 나이가 주는 연륜의 아름다움을 무대 가득 보여주며 노래하는 것이다. 어떤 모습일까, ‘설렌다’는 말로 그는 자신의 나이 듦을 표현한다. 내년 4월에는 뉴욕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이제 흰 머리가 검은 머리보다 훨씬 많아진 나이지만 그의 인생의 향기는 국화처럼 오래오래 길고 진하게 남을 것 같다. 그의 인생은 또다시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