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의 공포
최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D의 공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R의 공포’라는 단어의 출현 빈도수가 높았지만 실물경제가 위축되자 이번에는 ‘D의 공포’라는 말의 등장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여기서 D란 ‘디플레이션(Deflation)’의 앞글자이고 R는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리세션(Recession)’의 머리글자를 말한다.‘R의 공포’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는 금융 위기의 발발로 인해 실물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팽배했을 때다. 시간이 흘러 결국 경기 침체 상황에 빠지자 이번에는 ‘D의 공포’라는 단어가 ‘R의 공포’를 뒤로 밀어냈다.‘D의 공포’의 요체는 간단하다. 금융 위기로 경기 침체에 빠지자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시장이 위축되고 기업들도 투자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인플레이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과 반대로 물가가 하락하는 현상이다. 물가가 하락하면 좋은 것 아닐까.지난 30여 년간 고성장 과정에서 살아 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은 무서워해도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통상 어떤 나라든지 고성장 과정에서는 수요 증대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에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은 장기화된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점이다.얼마 전 디플레이션에 대해 재밌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당시 이 얘기에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명료한 촌철살인의 핵심어가 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아이가 아버지에게 물었다.“아버지, 물가가 하락하면 더 좋은 것 아닌가요? 집값도 내리고,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에서 물건도 지금보다 더 싸게 팔잖아요. 똑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데, 뭘 그리 걱정하세요?”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아들의 진지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잘라 말했다.“물론 네 말이 다 맞는단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이 되면 이 아버지는 실업자가 되어 있겠지.”디플레이션은 말 그대로 물가가 하락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특히 자산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현대 자본주의 역사상 디플레이션이 크게 문제가 된 때는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1929년 대공황 때다. 금융 위기 역사상 가장 오랜 기안 동안인 4년여의 침체기를 겪었던 시기다. 1929년 주식시장 붕괴로 시작된 금융시장의 붕괴는 연이어 실물경제의 위기로 이어졌다.사건의 진원지인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위기의 달러 경제’라는 책에는 1929~32년 독일의 실물경제를 다룬 수치가 나오는데, 그 숫자가 현실화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 고통의 강도가 섬뜩하게 다가온다.이 기간 동안 빵집과 정육점을 포함한 식료품 분야에서 연매출액의 32.1%가, 건축 분야에서는 66.4%가 줄어들었다. 실업자 수는 1929년 11월 203만 명에서 1932년 2월 612만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실물경제가 무너지고 실업률 등이 증가해 소비 시장이 위축되면 기업들의 입장에선 물건을 내다 팔아야 할 시장이 줄어들게 된다. 자연스레 기업들도 투자를 줄인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도 사줄 사람들이 없으니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인다. 이런 악순환에 한 번 빠져 버리면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디플레이션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다. 특히 1989년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폭락으로 시작된 일본의 1990년대는 디플레이션이란 함정에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그 고통이 얼마나 길고 오래가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바 있다.얼마 전 미국의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현재 1%인 기준금리를 제로(0)로 가져갈 수 있다는 의견을 내 놓았다. 디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해 금리 정책에서 마지막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제로 금리 정책을 시사하고 나선 것이다.이론적으로 금리는 마이너스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흔히 물가를 감안해 구매력의 관점에서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에 이르렀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금리가 제로라는 것은 한마디로 예금이나 저축과 같은 현금성 자산의 가치를 제로 즉, 0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현금성 자산의 가치를 제로로 만들면, 다시 말해 이자가 없으면 당연히 주식이나 부동산 혹은 소비로 돈이 흘러들어가야 한다.그런데 문제는 디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이 하락하고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흘러야 할 돈이 흐르지 않고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정지해 버리게 된다. 반대로 중앙은행이 명목상의 현금성 자산의 가치의 제로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 의도와 달리 현금성 자산의 실제 가치는 올라가 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왜냐하면 은행 이자는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주식과 부동산, 그리고 물가의 하락으로 현금의 실제 가치는 더 상승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금에 돈을 넣어 두지도 않고 오히려 장롱 속에 돈을 넣어 두는 현상마저 생겨난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예금금리는 1%가 채 되지 않는데 은행들은 통장 이용 수수료를 1% 받는다. 예금에 돈을 넣어두면 이자는 고사하고 현금을 까먹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이처럼 디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지면 주식도 부동산도, 예금도 좋은 투자 대안이 되기 어렵다. 현금을 그대로 갖고 있거나 아니면 금(金)과 같은 귀금속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니면 해외 투자를 해야 한다. 국내 시장이 디플레이션으로 역동성을 잃었기 때문에 해외 투자를 통해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것들은 일본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났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들이다.또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더욱 커진다. 금리가 낮아져 대출이자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금리가 낮아져도 부동산과 같은 실물 자산의 가치도 같이 떨어졌기 때문에 부채의 부담도 그에 비례해 상승하게 된다. 부채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인플레이션 시기와 디플레이션 시기 모두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수 없는 법이다.여기서 최근 가장 중요한 이슈는 미국이 기준금리를 제로로 가져간 후에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이 계속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으로 갈 것인가라는 점이다. 미국이 디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진다면 마땅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장기 디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경제 시스템도 다르고 정부의 대응도 일본보다 매우 발 빠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만일 미국이 일본의 궤적과 다른 길로 간다면, 이는 장기적으로 현 주식시장을 저가 매수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질지 앞으로 제로 금리의 약발이 잘 통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이지만 말이다.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국경제TV, 이코노미스트 등 경제 전문 매체의 재테크 담당 기자를 거쳐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사로 재직 중이다. 각종 칼럼 집필, 강의, 라디오·TV 출연 등을 통해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 콘텐츠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부자들의 개인 도서관’, ‘이채원의 가치투자(공저)’ 등을 펴냈으며 최근 십수 년 동안 연구한 부자들의 생각과 삶을 담은 ‘부자들의 생각을 읽는다’를 출간했다.이상건·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사 lsggg@miraeasset.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