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힘, 워싱턴의 싱크탱크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 행정부의 인선 작업이 속속 진행되면서 우리는 매우 낯익은 이름과 다소 낯선 이름의 싱크탱크 둘을 동시에 접하게 된다. 우선 90년의 역사를 갖춘, 미국은 물론 세계 싱크탱크의 대명사인 브루킹스연구소. 최근 다소 ‘중도화’ 경향이 강화되긴 했지만 전통적 ‘민주당’ 계열의 싱크탱크였던 이곳에서 오바마 당선자를 선거 과정에서부터 도왔던 이들이 많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물론 힐러리 클린턴을 도왔던 이들도 많았다). 수잔 라이스, 제프리 베이더, 리처드 부시, 피터 오재그 등이 오바마 행정부의 주요 각료로 이미 임명되거나 내정되고 있다.그런데 이제 겨우 5년 된 미국진보센터(CAP)의 등장은 놀라울 정도다. 인수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존 포데스타(창립자이자 대표),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 톰 대슐, 백악관 국내정책위원장 멜로디 반즈 등이 최고위직에 인선됐고 그들이 최근 발표한 ‘미국을 위한 변화: 제44대 대통령을 위한 진보 청사진’이라는 보고서는 향후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방향과 내용을 가늠케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보판 헤리티지재단’을 표방하며 민주당의 재집권을 최대 목표로 내걸었던 미국진보센터는 이미 브루킹스연구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 ‘여당’ 싱크탱크로 주목받고 있다.그동안 미국과 세계를 이끄는 정책과 인물들의 주요 배출구였던 헤리티지재단과 미국기업연구소는 이제 부시 행정부로부터 쏟아져 나올 수많은 관료 출신 전문가들의 ‘기착지’로 역할이 조정될 것이다. 반면 브루킹스연구소와 미국진보센터 등 민주당 계열의 싱크탱크들은 수많은 연구원들을 행정부로 내보내는 ‘공급처’나 외곽의 ‘지적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워싱턴 싱크탱크 세계의 거대한 ‘권력 이동’은 이미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현재 미국 싱크탱크의 전체 숫자는 연구자들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1500~1600개가량으로 파악되며 이 가운데 300여 개가 워싱턴 DC에 모여 있다고 한다. 랜드연구소(RAND)나 외교협회(CFR) 등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명 싱크탱크들은 대부분 워싱턴에 모여 있으며 특히 매사추세츠 애버뉴 일대에 모여 있다(다만 헤리티지재단은 국회의사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미국 싱크탱크의 역사와 유형은 흔히 ‘학생 없는 대학’으로 요약되는 정책 연구 기관 중심의 1세대(1832~1945년: 브루킹스연구소, 국제 평화를 위한 카네기기금 등), ‘정부 계약 수행자’들이 많이 등장하고 성장한 2세대(1946~1970년: 랜드연구소, 도시연구소 등), ‘정치적 주창조직’으로서의 싱크탱크 3세대(1971~1994년: 헤리티지재단, 케이토연구소, 정책연구소 등), ‘정치인 장식품’으로서의 싱크탱크 4세대(1995~현재: 닉슨센터, 카터연구소 등)로 구분된다. 이러한 유형들은 ‘단절’과 ‘대체’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중첩’과 ‘연속’의 역사로 이해되는 것이 적절하다. 현재 시점의 미국 싱크탱크들에선 위의 네 가지 유형이 모두 발견되며 개별 싱크탱크들 또한 다른 유형의 특징들을 동시에 포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지난 한 세대 동안 계속됐던 미국의 ‘보수주의 혁명’, 그리고 지난 8년간의 ‘네오콘’의 독주에는 보수적 싱크탱크들의 역할이 컸다. 1973년에 설립된 헤리티지재단은 싱크탱크의 역할과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레이건 공항에서 국회의사당까지 가는 20~30분 동안 읽을 수 있는 한두 쪽의 정책 브리핑 자료 생산, 주요 언론사들의 기명 칼럼(op-ed) 페이지에 적극적인 기고, 적극적인 ‘소액 다수’ 후원 회원 모집 등 ‘작지만 큰 변화’들을 주도하며 ‘정치적 주창조직’으로서의 싱크탱크의 전형을 만들어 냈다.부시 행정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싱크탱크는 미국기업연구소(AEI)였다. ‘네오콘의 아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강경 보수파들이 집결해 있고 실제 많은 연구원들이 부시 행정부에 직접 참여했다. 부통령 딕 체니, 부시 행정부 1기 당시 재무장관 폴 오닐, 경제 고문 로렌스 린제이,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글렌 하버드, 국방자문위원회 위원장 리처드 펄튼 등도 모두 이곳 출신이며 존 볼튼 전 유엔대사와 폴 월포위츠 전 세계은행 총재 등 대표적 네오콘 인물들은 공직에서 물러난 직후 곧바로 미국기업연구소로 돌아와 집필과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이러한 보수적 싱크탱크들의 ‘급성장’과 ‘압도적 영향력’은 보수적 재단들의 ‘장기간’에 걸친 ‘조직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들은 보수적 싱크탱크를 ‘조직’과 ‘사람’ ‘이념’을 키워내는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다.오바마 당선 이후 가장 많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미국진보센터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현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존 포데스타는 클린턴 대통령 수석보좌관 출신으로 ‘민주당의 재집권’을 위해서는 ‘진보판 헤리티지재단’의 존재가 절실하다고 공언했고 미국진보센터의 창립을 주도했다. 그는 ‘매일매일 우파의 주장을 논박하는 브리핑이 발표되고 공격적인 미디어 부서는 자유주의적 사상가가 케이블 TV에 출연하도록 돕고, 신랄한 내용으로 가득한 웹사이트가 만들어질 것이고 국내외 이슈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발표하는 싱크탱크’를 구상했고 그의 이러한 꿈은 조지 소로스 등 민주당 계열 부호들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현실화됐다.그리고 2003년 창립 이후 5년째인 2008년 올해 예산이 2000만 달러에 달하고 100여 명의 스태프와 연구원들, 미국 주요 언론 인용 빈도 전체 8위까지 급성장한 미국진보센터는 오바마 당선 이후 존 포데스타, 톰 대슐, 멜로디 반즈 등 센터 소속 대표적 인물들이 행정부의 핵심 요직으로 진출함으로써 자신들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회를 맞게 됐다. 이들과 함께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를 지냈던 커트 캠벨 박사가 2007년에 창립한 새로운미국안보센터(CNAS) 역시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국방 분야 인선과 전략 밑그림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하지만 이들이 모두 ‘새로운’ 인물들은 아니다. 오히려 오바마를 지지했던 진보적 사회 운동 진영에선 오래된 ‘중도파’들이 백악관과 내각을 장악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이미 높이고 있다).물론 미국진보센터가 과연 ‘진보판 헤리티지재단’으로서의 역사를 진정으로 써 내려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싱크탱크로 떠올랐던 진보정책연구소(PPI)는 그 이후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했다. 헤리티지재단이 보수 진영 전체를 묶어 내는 역할을 주도했던 것과 달리 미국진보센터는 조직의 경계를 넘어서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벌써 제기된다. 또한 미국진보센터의 핵심 인물들이 행정부로 진출하면서 오히려 공백이 발생하는, 소위 ‘성공의 역설’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분석 또한 흥미롭다. 그러나 오바마가 이끌어 갈 미국 사회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가장 주목해야 할 싱크탱크가 미국진보센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지식을 필요로 하는 권력’과 ‘권력을 필요로 하는 지식’이 서로 만들어 내는 워싱턴 싱크탱크 세계의 ‘영향력 지도’에 대한 보다 치밀하고 날카로운 분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홍일표·희망제작소 국제팀장 phong173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