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통신

“매일 같은 보고만 되풀이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올라온 자료 그대로 보고하려면 외교안보수석실에 행정관 1명이면 충분하다.”이명박 대통령이 해외 순방 직후 청와대 참모진을 강도 높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져 청와대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수석 비서관들이 얼굴도 못 들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관심은 이 대통령이 왜 그렇게 심하게 참모들을 질책했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모아지고 있다.문제가 된 자리는 이 대통령이 G20 금융정상회의 및 APEC(아·태경제협력체)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다음날(11월 26일)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 이날 회의는 오전 8시부터 3시간 40분 동안 마라톤식으로 진행됐다.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수석 비서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현안 처리 상황을 놓고 다그쳤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에게는 “통일부에서 올린 자료를 그대로 보고하고 실행하려면 행정관 한 명이면 충분하지 왜 외교안보수석실에 많은 인원이 필요한가”라고 질책했다고 한다. 정동기 민정수석은 인권위가 추천한 인권상 후보를 정부가 수상 대상에서 제외한 일 등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정진곤 교육과학문화수석은 ‘역사 교과서 수정 논란’과 관련, “수정을 거부하고 있는 출판사의 입장은 뭔가” “출판사 쪽에서 ‘정부의 검인정 취소’ 얘기가 나오는데, 이럴 경우 정부가 모든 부담을 짊어지는 것 아니냐. 연구는 해봤느냐”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고 한다. 박병원 경제수석도 최근 금융회사들의 몸 사리기 관행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점을 지적받았다는 후문이다. 알려지기로는 수석들이 이날 “시정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두세 차례 하면서 고개를 숙일 만큼 분위기가 냉랭했다고 한다.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에 대해 “늘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식으로 깨지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그러나 청와대 안팎에서는 이번 일이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해석하고 있다. 우선 항상 새로움을 강조하는 이 대통령이 관료 출신 참모들의 일처리 방식에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꼈다는 해석이다. 1기 때는 8명의 수석 중 관료 출신이 2명에 불과했으나 2기 때는 9명 중 5명이 관료 출신이다.이 대통령이 얼마나 관료적 일 처리를 싫어하고 창의성을 강조하는지는 당선 직후 가진 춘추관 출입 기자단과의 만찬(지난 3월 6일)때 발언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내가 수석들이 보고할 때는 가만히 쳐다본다. 새로운 생각이 있는지…, 장관들도 보고하는 것을 보면 생각을 갖고 보고하는지 그냥 경륜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대부분 생각을 갖고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도 그냥 참고 듣는 거지 뭐”라고 말해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었다. 이 대통령은 그러면서 기자들에게도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작성한 기사 스타일과 올해가 같아서는 안 된다”며 창의적인 업무 자세를 당부했었다.이런 이 대통령이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 국면을 맞아 대부분 관료 출신들로 구성된 청와대 2기 참모진과 함께 일하면서 상당한 실망감을 느꼈다는 게 청와대 안팎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해외 순방 중에 국내 보고를 받아보니 문제를 풀어보려는 고민이나 창의성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상황을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현학적’ 설명만 가득 차 있어 적지 않게 실망했고, 그런 실망감이 11월 26일 회의에서 가감 없이 분출됐다는 것이다.이 대통령은 11월 28일 확대비서관회의 자리에서도 “세계사적 변화를 겪는 운명적인 시기인 만큼 좀 더 창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고민을 많이 하라. 단순히 개별 부처가 하는 일을 취합해 보고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그런 일들을 해 달라”고 참모진을 다그쳤다.정가에서는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을 내년 초 개각과 청와대 조직 개편을 앞두고 참모진에게 내린 마지막 경고 정도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한마디로 목숨을 던지는 자세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근무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마지막 ‘옐로카드’인 셈이다.박수진·한국경제 정치부 기자 notwom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