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에 달린 차베스 대통령의 운명
“미국의 금융 위기는 사악한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서곡이다.”남미 좌파 정권의 선봉을 자처하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지난 11월 13일 국민 연설에서 미국에 대해 이 같은 쓴소리를 했다. 그러던 그가 불과 보름도 안 돼 “국제금융 위기와 세계경제 침체 여파로 인해 유가가 지금 추세대로 계속 하락한다면 베네수엘라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실토했다.12월 6일 집권 10년을 맞은 차베스 대통령이 ‘좌불안석’이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막지 못한 그의 사회주의 혁명을 유가 하락이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에도 베네수엘라 경제는 더욱 번창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중남미 국가들에 경제 지원을 약속하던 그의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베네수엘라는 세계 5위의 석유 수출국이다. 수출의 90%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고 있으며 정부 예산의 거의 절반을 석유 판매를 통해 마련하고 있을 정도다.차베스 집권 10년간 국제 유가는 10배 이상 상승했다. 이를 통해 얻어진 막대한 석유 자본은 그의 정치적 인기의 원동력이자 그가 추진하는 ‘볼리바르 혁명’의 물적 기반이었다. 볼리바르 혁명이란 차베스 대통령이 주창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식 사회주의 운동을 일컫는 말로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독립전쟁을 이끈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 장관의 이념을 모태로 삼고 있다.유가 상승 덕택에 지난 5년간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GDP)은 두 배로 불어났고 2800만 명에 달하는 극빈자 중 600만 명이 빈곤 상태를 탈출했다.하지만 지난 7월 배럴당 150달러에 육박하던 국제 유가가 50달러 안팎으로 급락하면서 차베스 대통령에게 위기감이 엄습하고 있다. 유가 하락으로 베네수엘라 통화인 볼리바르의 실질 가치가 급락, 올해 인플레이션은 30%까지 치솟았다. 또 생필품과 주택 부족 및 부패와 범죄 확산 등 고질병이 다시 퍼지며 차베스의 지지 기반인 빈곤층의 민심 이반이 확산되고 있다.지난 11월 23일 실시된 베네수엘라 지방선거도 차베스의 정치 리더십에 타격을 안겼다. 집권 사회주의자연합당(PSUV)이 53%를 얻어 야권 지지율 41%를 수적으로는 앞섰지만 수도 카라카스의 다섯 주 주지사를 내주는 등 기존의 압도적인 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었다.특히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주창해 온 차베스 대통령의 중요한 지지층이라고 할 수 있는 빈곤층이 수도 카라카스에서 등을 돌린 사실이 확인되면서 여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구체적으로 카라카스에서 빈민 지역으로 꼽히는 수크레 지역구에서 야당이 승리함으로써 빈민층은 차베스를 지지한다는 ‘전설’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됐다.이런 가운데 차베스는 종신 집권 의지를 드러내며 권력욕을 더욱 불태우고 있다.차베스는 지난 11월 30일 TV 연설을 통해 “2021년까지 여러분과 함께할 준비가 돼 있다“며 “사회 개혁을 방해하는 야당 주지사 및 시장들과 정부 지지자들에 대한 공격 등을 보면서 좀 더 대통령직을 해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1998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차베스는 2013년에 임기가 끝나면 더 이상 대통령직에 출마할 수 없도록 현행 헌법에 규정돼 있다.차베스는 이미 지난해 12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철폐하고 종신 집권 허용을 담은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근소한 표차로 부결되면서 정치적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바 있다.그는 최근 군부와 지지자들에 대한 연설을 통해 “지난해 국민투표에서 졌을 때 그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고 여러분에게 말했지만 파시스트들의 위협이 명백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당시 (결과를 수용하지 말라던) 여러분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적들과의 대결을 준비해야 한다”며 “혁명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이제 그의 정치적 운명과 볼리바르 혁명의 성공 여부는 유가 추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베네수엘라가 최근 국제 유가 급락세에 제동을 걸기 위해 원유 생산량을 하루 100만 배럴 감축하라고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촉구한 데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유병연·한국경제 기자 yooby@hankyung.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