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여 개 향기 배합…사향노루 분비물, 항고래 배설물과 같은 독특한 향기, 여성 허영심 채워줘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샤넬④
샤넬 N˚5
샤넬 N˚5
샤넬은 1914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더 이상 도빌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도빌도 독일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빌에 문을 연 샤넬 부티크는 샤넬이 없어도 잘 돌아갈 정도로 자리 잡았다. 샤넬과 동생 앙투아네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평온했다. 샤넬과 연인인 아서 카펠(애칭 보이)은 여전히 성업 중인 레스토랑과 극장을 찾아다녔다. 샤넬과 보이뿐만 아니라 프랑스 상류층은 전쟁의 포화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서 특권을 누렸다.

‘코코 샤넬’의 저자 에드몽드 샤를 루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랑스는 새로운 계급 사회로 나뉘었다. 전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파리에서 떠드는 사람들, 도빌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비아리츠(프랑스 남서부 대서양의 휴양 도시)에서 즐기는 사람들.”

보이와 샤넬도 1915년 여름 파리를 떠나 비아리츠로 갔다. 스페인에 인접한 이곳은 유럽 여러 나라 부유층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황실 친척들도 자주 찾는 곳으로 항상 관광객들로 붐볐다. 가까운 곳에 스페인 귀족들의 아성으로 불리는 산세바스티안이 있어 더욱 그랬다.

보이는 비아리츠를 여름휴가 때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여겼지만 샤넬은 탁월한 사업 감각을 발휘했다. 이곳에 휴양 하러 오는 유럽의 부유층들을 겨냥한 분점을 낼 계획을 세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아리츠에 부유층들의 욕구를 채워 줄 명품 매점들이 없다는 것을 샤넬은 눈여겨봤다. 샤넬은 파리와 도빌에서는 매장으로 상가를 택했던 것과 달리 여기에선 고급 주택을 빌렸다. 이번에도 보이가 30만 프랑을 빌려줬다. 비아리츠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급 사치품을 들여왔고 대성공을 거뒀다. 스페인 왕가도 샤넬 매장을 자주 찾았다.

1915년 12월 샤넬은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비아리츠 부티크는 자신이 없어도 운영될 수 있다고 판단해 동생 앙투아네트에게 맡기고 파리로 돌아왔다. 1910년 문을 연 파리 캉봉가의 ‘샤넬 모드’ 운영에 힘을 쏟았다. 이듬해 봄 샤넬은 직원 300명을 거느린 회사의 사장이 됐다. 그의 의상 제작 특징은 스케치를 하거나 인체 모형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델을 세워 놓고 직접 작업했다. 서른 번이나 가봉하는 등 마음에 들 때까지 작업하기 때문에 모델이 6~7시간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모델들에게 지급하는 돈은 박했다. 샤넬의 모델이 된다는 것 자체가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특권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모델들은 모두 예쁜 아이들이니 돈이 필요하면 애인을 구하면 된다”는 인식이었다.
1920년 샤넬(왼쪽)과 그의 새 연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러시아 대공. 파블로비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로 러시아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1920년 샤넬(왼쪽)과 그의 새 연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러시아 대공. 파블로비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로 러시아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활동적 여성’에게 맞는 보이시한 패션…1920년대 ‘성공 가도’

샤넬의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샤넬은 1916년 봄 보이에게 빌린 사업 자금을 모두 갚았다. 샤넬 패션의 특징은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점이다. 고아원 생활의 엄격함 등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그때까지 남성 패션 디자이너들이 우아하다고 여겨 온 거추장스러운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만의 스타일로 마치 “내가 곧 스타일이다”라고 선포하는 것 같았다.

미국 뉴욕의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는 1915년 “샤넬 상품을 최소한 하나라도 갖추지 않은 여성은 유감스럽게도 한물갔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극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넬은 자신의 유명세를 당연하다는 듯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제야 올바른 대접을 받고 있다는 듯 여겼다.

샤넬의 연인이자 후원자인 보이는 귀족의 막내딸인 다이애나 윈덤과 결혼했다. 하지만 샤넬과의 관계는 이어 갔다. 그러나 그는 1919년 12월 23일 샤넬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부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샤넬은 큰 슬픔에 잠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았고 보이를 잃었을 때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듬해 2월 공개된 보이의 유언장에는 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62만 파운드, 샤넬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정부(情婦)에게 각각 4만 파운드를 상속했다. 100년 가까이 2011년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필드는 ‘보이 샤넬 핸드백’을 제작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연인의 죽음 이후 샤넬은 일에만 매달렸다. 샤넬은 1920년대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 당시 패션계에서는 새로운 것은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시대였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는 바람에 여성들이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샤넬은 이런 시대 상황을 정확하고 신속하게 읽고 패션에 반영했다. “나는 이제 새 시대의 여성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시녀들이 스타킹까지 신겨 주는 여성들을 위해 옷을 만들었지만 이제 내 고객은 그런 여성들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활동적인 여성들이 내 고객이 되었다. 그들은 내 옷을 입고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하고 소매를 걷어붙일 수 있어야 한다.”

프랑스 여성들 사이에선 ‘가르손 룩’이 유행했다. 가르손은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마르그리트가 해방된 젊은 여성을 모델로 한 장편 소설 ‘라 가르손(La Garconne)’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가르손 룩은 새롭고 극단적으로 날씬한 실루엣을 일컫는 신조어로, 남성풍의 여성복, 즉 일종의 보이시한 스타일을 뜻한다.

그해 샤넬의 새 연인이 등장했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러시아 대공이다. 그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조카로,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제정 러시아의 수도사로 니콜라이 2세의 총애를 받고 전횡을 일삼던 그리고리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가진 게 없었던 파블로비치는샤넬의 집에 들어왔다. 그는 샤넬의 사업에 매우 중요한 사람을 소개해 줬다. 그리스의 향수 제조 전문가인 에르네스트 보다. 천재 조향사인 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 화학자의 아들이다. 이 소개가 샤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샤넬 넘버파이스(N˚5) 탄생의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샤넬은 보에게 현대 여성성에 대한 자신이 비전을 담은 향수 제작을 부탁했고 보는 그런 역할을 충실해 해냈다.
디자이너 칼 라거필드가 2011년 샤넬 연인의 이름을 따 만든 ‘보이 샤넬 핸드백’. 출처:chanel,com
디자이너 칼 라거필드가 2011년 샤넬 연인의 이름을 따 만든 ‘보이 샤넬 핸드백’. 출처:chanel,com
새 연인 러시아 대공, 천재 조향사 소개, N°5 탄생

샤넬 넘버 파이브 향수의 제조 공식은 그 이전에도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가 아니더라도 샤넬 넘버 파이브가 다른 이름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향수는 장미향·라일락향·라벤더향 등 특정 꽃냄새가 지배적인 향기를 지니고 있었고 샤넬은 그런 향기에 대해 “끔찍하다. 여성을 꽃병으로 만들려는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샤넬 넘버 파이브엔 재스민 꽃향기를 기본으로 80여 가지의 향기가 배합돼 형언할 수 없는 향기를 담았다. 사향노루의 분비물, 항고래의 장 배설물과 같은 독특한 향기를 뿜으면서 여성의 허영심을 채워 주기에 충분했다. 화학적으로 섞은 세계 최초의 알데히드 향수는 샤넬이라는 이름과 결합해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탄생했다. 이 향수는 따뜻하면서도 차고 달콤하면서도 떫은 듯하다. 샤넬의 주문대로 여성의 다면적이고 모순적인 특성을 담고 있다.

샤넬이 향수 이름에 넘버 파이브를 붙인 것은 숫자 5의 모양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넘버 파이브는 나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추상적이고 독특한 이름, 위엄 있고 겸허하게 나의 옷 주변을 휘감는 향수”라고 회고했다. 샤넬 넘버 파이브를 위해 디자인한 작은 유리 향수병은 그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둥그런 형태의 아기자기한 유리병과 비교하면 정사각형의 병에 하얀 라벨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샤넬 넘버 파이브는 미국 유명 배우 마릴린 먼로가 잠 들기 전 몸에 뿌리고 잔다고 할 정도로 그 이후 고급 향수의 대명사가 됐다. 샤넬 스타일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