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배분의 역사
1980년대 이후 미국 자본시장에서 시작된 중요한 논의 중 하나는 과연 장기적으로 투자 수익에 어떤 변수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당시만 해도 투자 수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 타이밍이나 종목 선택이라는 게 통념이었다. 그러나 찰리 엘리스나 게리 브린슨 등 몇 몇 선구적인 분석가들은 경험적 근거를 들어 이런 통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시장 타이밍 전략을 그럴 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쓸모없는 아이디어다. 올바른 자산 배분 전략만이 장기 투자 수익에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자산 배분 이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찰리 엘리스는 자신의 저서 ‘패자의 게임(Winning the Loser’s Game)’에서 마켓 타이밍 전략에 대해 아주 간단한 반론을 제시한다. ‘1926년부터 1996년까지 70년 동안 전체 주식 투자로 인한 수익은 가장 성과가 좋았던 60개월-전체 862개월의 7%에 불과-사이에 이루어졌다. 이익이 발생한 달이 언제인지는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만약 그 고마운 60개월이 없었다면 두 세대에 걸쳐 쌓아 온 모든 투자 수익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대형 기관투자가라고 하더라도 시장 저점에 들어갔다가 시장 고점에서 빠져나오기란 사실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그러나 이런 생생한 증거 앞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시장의 바닥을 찾고 상투에서 탈출하는 것을 꿈을 꾼다. 마치 신기루를 좇는 격이다.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길일까. 실증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산 배분이 장기 투자 성과에 90%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그 증거는 있는가. 다시 말해 자산 배분을 통해 성공적인 투자 결과를 달성한 증거가 있는가 말이다.바로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예일대 기부금 펀드의 최고 투자 책임자(CIO)인 데이비드 스웬슨이다. 그는 CIO임에도 불구하고 주식을 직접 사고팔지 않는다. 여러 자산에 자산 배분하는 전략을 통해 지난 10여 년간 연평균 17.2%라는 빼어난 투자 수익을 올렸다. 미국 기부금 펀드계의 슈퍼스타인 스웬슨의 별명은 ‘기부금 펀드계의 베이비 루스’라고 한다.그의 투자 전략을 ‘멀티에셋 클래스 투자(multi-asset class investing)’라고 한다. 이는 연금이나 기부금 펀드는 주로 채권과 블루칩 위주의 포트폴리오로 구성해야 한다는 당시의 통념에 반하는 것이었다. 스웬슨은 주식 비중을 더 높이고 해외시장과 원자재와 같은 천연자원, 그리고 헤지 펀드와 사모 펀드 등 대체 투자를 포트폴리오에 편입했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크게 6개의 자산군(표 참조)으로 나눠져 있다.스웬슨은 매년, 혹은 일정 시점을 정해 시장 상황에 따라 이 비중이 변하면 수익이 난 곳에서 돈을 찾아 비중이 떨어진 곳으로 옮겨 비중을 조정해 나간다. 규칙적인 리밸런싱(rebalancing)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다. 언뜻 매우 간단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철저한 자산 배분을 통한 분산 투자를 통해 장기 성과를 달성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이 상승해 국내 주식의 가격이 떨어지면, 반대로 부동산과 천연자원의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주식의 가격 하락 위험을 상쇄하는 포트폴리오인 것이다.여담이지만 스웬슨은 무척 독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엄청난 연봉을 제시해도 자신의 모교인 예일대 캠퍼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리를 옮기지 않고, 1985년도에 예일대 기금을 맡을 때도 자신이 근무하던 투자은행에서 받던 급여의 절반만 받고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를 강력히 추천한 인물은 ‘토빈의 Q’로 유명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스웬슨의 스승인 제임스 토빈 교수다. 스웬슨은 토빈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웬슨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는 사람이 앞서 얘기한 자산 배분 이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찰리 엘리스다. 엘리스는 현재 예일대 기금 투자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얼마 전 미래에셋의 초청으로 한국을 첫 방문하기도 했다.스웬슨이 운용을 아웃소싱할 때 견지하는 원칙도 개인 투자자들이 참고할 만하다. 스웬슨은 운용사를 선택할 때 소유주가 직접 운용을 하는 회사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사업가나 전문 경영인이 운용하는 회사는 운용에만 신경을 쓰는 ‘소유주=전문 투자가’에 비해 단기적인 이익을 좇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결국 회사를 결딴내고 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실 이런 주장은 몇몇 빼어난 투자가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세계적인 가치주 투자 회사인 트위디 브라운의 CIO인 크리스토퍼 브라운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펀드매니저가 주인인 자산운용사의 펀드를 선호한다. 이것이 언제나 신뢰할 만한 선택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펀드를 마케팅하거나 판매하는 사람이 자산운용사를 경영한다면 고객이 맡긴 돈을 잘 운용하는 것보다는 펀드를 더 많이 팔아 운용 자산을 키우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펀드매니저가 회사의 주인이라면 그들을 해고할 수 있는 사람은 투자자밖에 없다.”개인 투자자들도 스웬슨과 같은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비중을 조절하는 전략을 쓸 수 있다. 아니면 몇 가지 간단한 규칙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100-나이의 법칙’도 한 가지 방법이다. 자신의 나이에서 뺀 금액만큼을 주식형 펀드과 같은 위험 자산에 투자하고 매년 시장 변동에 따라 비중이 변하면 원래의 비중으로 되돌려 놓는 리밸런싱을 하는 것이다.보다 기술적으로는 금리 변화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채권 금리가 8%로 올라가면 주식 비중을 20로, 반대로 채권 금리가 뚝 떨어져 4%가 되면 주식 비중을 60%로 늘리는 식이다. 이 방법은 장기적으로는 금리와 주가가 역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과 단기적으로는 시장 변화에 상대적으로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주가 이익률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흔히 주가수익률(PER)의 역수로 표현되는 주가 이익률은 주식과 채권, 그리고 부동산은 서로 경합한다는 사고방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 일정 시기별로 이익률이 높은 쪽으로 자산 비중을 높여 놓는 전략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에 필자가 쓴 8월 11일자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투자에서 중요한 자세는 시장을 맞출 수 없다는 겸손함이다. 고유 위험인 시장 변동은 인간의 통제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 오히려 자산 배분 전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간단한 규칙을 지속적으로 반복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 투자 성과를 높이는 길이다. 투자에선 토끼 전략보다는 거북 전략이 더 나은 법이다. 그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한국경제TV, 이코노미스트 등 경제 전문 매체의 재테크 담당 기자를 거쳐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사로 재직 중이다. 각종 칼럼 집필, 강의, 라디오·TV 출연 등을 통해 자타가 공인하는 금융 콘텐츠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부자들의 개인 도서관’, ‘이채원의 가치투자(공저)’ 등을 펴냈으며 최근 십수 년 동안 연구한 부자들의 생각과 삶을 담은 ‘부자들의 생각을 읽는다’를 출간했다.이상건·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사 lsggg@miraeasset.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