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입체 취재

‘대량살상무기’가 터지고야 말았다. 5년 전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파생상품을 대량살상무기라고 부르며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매년 수십%의 수익을 안겨주는 파생상품을 미친 듯이 사랑했다. 그리고 5년 후, 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세계적인 투자은행(IB)이 맥없이 쓰러지고 금융시장은 요동을 치고 있다.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은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오간다. 지루했던 위기의 마지막 국면일까, 아니면 새로운 위기의 시작일까.2008년 9월 셋째 주는 세계 금융시장 역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투자은행계의 거인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4위 IB인 리먼브러더스는 파산 신청을 했고 3위 IB인 메릴린치는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에 인수됐다. 또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는 구제금융을 통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굴욕을 당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2위 IB인 모건스탠리는 미국 4위의 은행인 와코비아와 합병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이렇게 되면 세계 상위 5위권 IB 가운데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은 골드만삭스밖에 남지 않는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는 공적자금을 추가로 집행해야 하는 일이 생길 경우 미국의 국가 신용 등급이 하락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미국이 자랑하는 첨단 금융 산업이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IB들의 몰락은 세계 금융시장에 핵폭풍을 일으켰다. 주식시장이 일제히 폭락하고 리보 금리가 하루 만에 두 배로 뛰었다. 주식시장이 무너지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평가되는 실물 자산 가격이 폭등했다. 하락세를 면치 못하던 금, 석유 등이 오름세로 복귀한 것이다.국내 금융시장은 그야말로 융단폭격을 맞았다. 코스피와 코스닥이 폭락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현금 확보 비상이 걸린 외국계 투자자들의 매도 공세 탓에 환율이 급등했다. 하루에 4~5%씩 환율이 오르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환 헤지 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한 기업들의 손실이 급팽창했다. 6월 말 1조5000억 원 정도이던 손실액이 환율 급등으로 2조3000억 원 수준으로 불어났다. 은행들은 대출의 문을 닫아걸고 이왕에 집행된 대출에 대해선 금리를 올리고 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들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했다.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이번 금융 위기를 100년에 한번 올까 말까 한 사태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위기의 골이 길고도 깊다는 의미다. 일각에선 이번 위기는 새로운 위기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겁을 주고 있다. 도미노 파산의 서막이 올랐을 뿐이라는 불길한 진단이다.실제로 미국 금융 기업 상당수가 부실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 7위 은행인 워싱턴뮤추얼이 대표적이다. 현재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파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중소은행들의 파산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부실 가능성이 높은 문제 은행 리스트(Problem Bank List)를 117개로 확대했는데 이 가운데 15개 정도가 올해 안에 파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금융 위기가 실물 경기의 위축으로 이어지면 세계 경제의 후퇴를 각오해야 할 것이란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금융 산업 등 서비스 산업의 비중이 높은 미국 경제의 특성상 금융 위기는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장될 수 있다는 논리다. 고용이 줄고 이에 따라 소비가 감소하면 제조업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고 이는 다시 투자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다행히 아직까지는 실물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는 징후는 없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지나치게 위축되는 것은 미래를 위해서 좋지 않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근 방한한 찰스 달라라 미국 국제금융연합회(IIF) 총재는 한국의 위기감은 과도하다고 지적했다.그는 “세계시장의 여파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는 이해가 가나 현 상황이 한국 경제에 현재 특별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금융 위기나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같은 맥락에서 이번 위기를 꼭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최초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관련 부실이 드러난 이후 지속된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이 이번 부실 IB들의 정리를 통해 마무리 국면에 돌입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김세중 신영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리먼브러더스의 부실이 상당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고 파산 신청도 불확실성을 줄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며 “AIG를 마지막으로 예상할 수 있는 큰 위기는 모두 넘긴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이번 위기가 지나고 나면 미국의 금융시장은 상당히 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종전의 IB 모델이 재고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다소 보수적인 상업은행들이 IB들을 대거 인수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설득력이 있는 시나리오다. 달라라 총재 역시 “IB와 상업은행을 이분화해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만 현재의 독립 IB 개념은 끝났다”며 “그러나 여전히 IB가 유효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IB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거나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취재= 변형주 기자 / 이익원 한국경제 뉴욕 특파원·차병석 한국경제 도쿄 특파원전문가 기고= 조윤남 대신증권 투자전략부장사진= 서범세·김기남 기자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