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택 원샷보카 대표

임형택(38) 대표는 장사꾼이라기보다는 연구실 붙박이 같은 스타일이다. 짧은 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 사업가와 달리 말을 느릿느릿하게 하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의 히트 상품 ‘깜빡이’도 그처럼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묵혀 온 것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일명 ‘깜빡이’ 학습기, 제품명은 ‘보카마스터 GP2X’이지만 부르기 쉬운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잘 팔린다는 소문이 나면서 ‘반쪽이’ 등의 비슷한 상품들도 나오고 있다. 영어를 공부하는 중고등학생들이나 대학생, 직장인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는 이 상품의 원리 자체는 간단하다. 화면에 영어 단어를 2초 동안 보여주고, 한글로 된 뜻을 1초 보여준다. 다시 새로운 단어를 2초, 뜻을 1초, 이렇게 수천 단어가 반복된다.“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졸업을 대비하며 학교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많이 보던 ‘거로(巨勞) 버캐뷸러리(Vocabulary) 33000’을 시작했는데, 하루 3시간 동안 50단어 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한 달 내내 외워야 1500개였는데, 그마저도 한 달이 지나니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깜빡이’가 절 살렸습니다.”두꺼운 단어집을 독파한다는 것이 보통 학생들에게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아, 나는 안 돼’라며 스스로에게 실망하던 임 대표는 갑자기 ‘차라리 강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를 보게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공은 신문방송학이었지만 부전공으로 전산학을 선택한 임 대표는 당시 ‘인지과학’에 관심을 가졌기에 이런 아이디어가 가능했다. 한때 MIT 미디어랩에 유학하는 것을 꿈꾸며 미국에 건너가기도 했던 그였다.때는 1992년, 386 컴퓨터에 흑백 모니터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임 대표는 ‘클리퍼’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화면에 영단어와 뜻이 반복해서 나타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을 짰다. 처음에는 500단어로 시작했다. 단어당 3초, 모든 단어를 보는데 2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책으로 직접 볼 때 50단어에 3시간 걸린 것에 비하면 획기적이었다.자신감이 붙은 임 대표는 점차 많은 단어를 집어넣었다. ‘거로 버캐뷸러리’의 2500단어, ‘거로 버캐뷸러리 워크숍’의 5500단어, ‘거로 버캐뷸러리 33000’의 2990단어,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 총 7500단어가 수록된 투박한 형태의 ‘깜빡이’ 학습기 프로토타입(prototype: 원형)이 완성된 것이다.“암기는 ‘해브(have: 가지다)’가 아니라 ‘퍼밀리어라이즈(familiarize: 익숙해지다)’입니다. 처음 본 사람은 이름도 외우기 힘들지만, 자주 보는 사람은 이름, 직책, 생일까지 기억하는 것처럼 영어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엔 10%만 기억에 남지만 자꾸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한 단어가 되지요.”그렇지만 평범한 대학생이 이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연결하기는 무리였다. 당시 겨우 삐삐가 나온 기술 수준으로는 휴대용 학습기 개발은 생각조차 못할 때였다. 결국 남들에게 비밀로 한 채 ‘비장의 무기’로 가슴 속에 간직해 두어야만 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꿈을 펼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1997년 혼수 비용으로 모아둔 2000만 원을 털어 당시 시장에 갓 나온 문자 삐삐를 만드는 회사에 깜빡이 학습기 제작을 의뢰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보기술(IT) 시장은 문자 삐삐를 건너뛰어 곧바로 휴대전화로 옮겨갔다. 결국 임 대표는 딱 200대만 팔고 쓴맛을 봐야 했다.“가장 어려웠던 것은 이 기계를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이 기계가 뭣 하는 물건인지 이해시키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또 영어단어가 외워진다고 누가 보장해 준 것도 아니고,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테스트할 돈도 없었고요.”2002년 깜빡이 2차 버전이 나왔다. 갤럽코리아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와 의기투합해 1000대를 제작했다. 임 대표는 제품을 팔기 위해 전국의 학원을 돌며 영업을 시작했다. 문전박대를 당하며 스스로 ‘장돌뱅이’ 라고 부르는 생활을 계속한 것이다. 다행히 인터넷의 수능연구모임 커뮤니티에 소개되면서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얼리어답터를 자처하는 학원 선생님들로부터도 문의가 들어왔다. 제품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물건을 가져간 학원에서의 수금은 힘들었다. ‘돈을 못 주겠다’는 것. 학생들을 붙잡아 두어야 하는 학원의 생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임 대표는 이때 큰 교훈을 얻었다. “상품 자체가 좋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파는 사람에게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은 상품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입소문이 나면서 2006년에는 버전업된 세 번째 깜빡이가 나왔다.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제작된 깜빡이는 휴대용 게임기 모양을 하고 있다. 발음을 들려주는 기능이 추가됐다. 이 모델로 2007년에는 주요 언론사가 주관하는 ‘교육산업대상’을 수상하고 중소기업청장 상을 받았다. 중소기업청장 상을 받고 나니 광고심의기구도 이상한 광고를 하지 말라는 공문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2008년 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2007년에는 겨우 2000대가 팔려 적자를 봤지만 올해 판매·유통 조직이 붙으면서 7월에만 5000대가량이 팔렸고 8월에는 7000대 이상 판매를 예상하고 있다. 올해 매출 200억 원을 무난히 올릴 것으로 보인다. “제가 직접 광고를 제작하고 전화를 받을 때는 하루에 100개의 문의가 오고 판매율도 7%에 그쳤지만 전문가가 하니까 하루 500개의 문의, 판매 성공률이 25~30%에 이르더군요.”임 대표의 독특함은 개발 과정뿐만 아니라 경영에서도 나타난다. 원샷보카의 직원은 임 대표 한 명뿐이다. 1인 기업인 셈이다. 생산 판매 홍보 담당이 모두 외주 업체로 이뤄져 있다. 대신 그 모두를 하나의 회사처럼 움직일 수 있는 역량이 경영의 핵심이다. “나이키(Nike)같은 회사를 보세요. 회사는 버추얼 컴퍼니(virtual company)에 가까우면서 전 세계에 네트워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아이디어는 좋지만 조직 관리가 말처럼 쉬운 것일까. “수년간 적자에 허덕이던 제작사가 요즘은 월 1억 원 이상의 순이익을 내고 있습니다. 제작사가 오히려 고객의 클레임(claim: 항의)을 가장 겁냅니다. 제가 계약을 해지할까봐 스스로 기계의 문제점을 파악해 바꿉니다. 실제로는 제가 연봉 12억 원짜리 회사를 거느린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제조사뿐만 아니라 텔레마케터들도 깜빡이로 월 300만~500만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제조사 직원 25명을 포함해 총 300여 명의 직원이 임 대표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지금에 와서 임 대표는 ‘시장’ ‘상품’이라는 것을 새삼 되돌아본다. “하나의 상품이 시장에 들어와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라리 제가 자장면을 팔았으면 제품을 설명하는 데 힘들지 않았겠지만, 깜빡이를 이해시키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겨우 제품을 이해시키고 난 뒤에는 판매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유통이라고 하면 대형 유통 업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저처럼 힘이 없는 사람이 많은 비용을 들여 진입할 수가 없었어요. 또 제품만 좋아서도 안 되고 그 제품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익을 남겨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지금까지는 제품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면 이제부터는 제품이 생활 속에 파고든 모습 위주의 홍보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10여 년 전 휴대전화 광고는 대부분 ‘잘 걸린다’ ‘전파의 힘이 강하다’는 것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현대생활백서’ 유형의 광고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쟁자들이 생긴 이상 한발 앞서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각오다.약력:1970년 서울 출생. 94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97년 갤럽코리아 입사. 2001년 한국신용정보 연구원. 2002년 원샷보카 대표이사(현).우종국 기자 xyz@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