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중고와 싸우는 미국 경제

미국 경제가 고유가, 금융 위기, 주택 경기 침체라는 ‘3중고’에 빠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진단이다. 이에 따라 경기 하강 및 인플레이션 증대 위험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이를 ‘통화정책 결정론자에 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버냉키 의장은 그러면서도 FRB의 최우선 추진 과제를 금융시장 안정으로 천명했다. 금융 위기 해소를 위해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다.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유가나 주택 경기 침체는 FRB가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사항이다. 단기간에 어떻게 되지도 않는다. 반면 금융 위기 해소는 FRB가 힘을 미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으로 말하면 현재의 금융 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을 버냉키 의장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따라서 금융 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조기에 진정되느냐, 아니면 갈수록 증폭되느냐 여부는 미국 경제는 물론 글로벌 경제를 좌우할 중요한 변수임에 틀림없다.버냉키 의장이 꼽은 삼중고 중 첫 번째는 고유가다. 최근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지만 고유가는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의 화약고다. 유가가 오르면 대부분 물건 값이 오른다. 물건 값이 오르면 실질 구매력은 감소한다. 구매력 감소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그래서 인플레이션 압력이란 얘기가 나온다. 고유가를 진정시키지 않는 한 인플레이션 압력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경제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질게 뻔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성장은 정체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만 높아지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인플레이션 압력과 경기 하강 위험이 동시에 높아지고 있다’는 버냉키 의장의 고백을 거꾸로 뒤집어보면 스태그플레이션의 단초가 보이고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문제는 고유가가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 같다는 데 있다. 골드만삭스 등은 ‘배럴당 200달러 시대’를 이미 예고했다. 자기들이 원유 선물에 상당히 투자했기 때문이라는 말들이 나오지만 그래도 세계 최대 투자은행인데 나름대로 근거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이 53명의 월가 이코노미스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2월 유가는 배럴당 125.51달러로 전망됐다. 내년 6월엔 112.82달러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다. 유가가 점차 하향세를 타겠지만 큰 폭으로 떨어지긴 힘든 것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주택 경기 침체는 더하다. 아직까지 집값은 사상 최대 하락률을 기록하고 있다. 압류당하는 가구 수가 늘고 있다. 싼값에 나오는 집을 대상으로 한 저가 매수세가 일부 지역에서 일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거래 규모는 여전히 감소세다. 이코노미스들이나 전문 기관들은 대부분 내년까지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조사에서 내년 상반기를 집값 바닥으로 예측한 이코노미스트는 38%, 내년 하반기를 꼽은 사람은 40%에 달했다.지난 3월 베어스턴스 사태 이후 일단 잠복했던 금융 위기도 마찬가지다. 주택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모기지 부실이 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금융 회사의 부실 증가로 이어진다.이미 신용 위기는 누적돼 왔다. 작년 8월부터 본격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으로 금융 회사들의 생존 능력은 한계에 이르고 있다. 조금 더 장기화될 경우 줄 파산도 불가피한 상황이다.줄 파산의 징조는 이미 나타났다. 지난 3월 문제가 된 베어스턴스는 어쩌면 시작에 불과하다. 지난 7월 초에는 미국 7위의 저축대부조합이자 미국 2위의 모기지 회사인 인디맥 뱅크가 영업 정지됐다. 손실이 커짐을 느낀 고객들이 예금 인출에 나선 탓이다.그뿐만 아니다. 급기야는 미 정부가 투자한 국책 모기지 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 맥도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두 회사는 모기지 회사로부터 모기지를 사들이거나 모기지를 담보로 한 채권을 발행할 때 보증을 서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보유한 모기지(보증 포함)는 5조2000억 달러. 미 전체 모기지(11조 달러)의 절반에 육박한다.이들이 잘못되면 모기지 시장이 마비된다. 채권 시장도 붕괴된다. 모지지와 채권 시장 붕괴는 결국 미국 경제가 무너진다는 걸 뜻한다. 그뿐만 아니다. 두 회사는 정부 투자 기관인 만큼 정부 와 맞먹는 신용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택금융공사쯤으로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발행한 채권도 상당한 신용도를 갖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이나 연기금 등은 이들의 채권을 필수 포트폴리오로 편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잘못되면 국제 금융시장도 혼란에 빠진다.다행히 두 회사는 미 정부와 FRB의 긴급 구제책으로 한 고비를 넘겼다. 두 회사의 중요성을 잘 아는 미 정부로서는 위기감 진화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금융위기설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오히려 ‘다음 차례는 누구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생생하다. 일부에서는 미 최대 저축대부조합인 워싱턴 뮤추얼도 부실이 엄청날 것이라며 삐딱한 시각을 보내고 있다.대형 은행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보니 중소형 금융 회사는 더욱 힘들게 뻔하다. 모기지 부실로 손을 드는 은행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상존한다. 일부에서는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의 보험 대상인 7500여 개 금융 회사 중 150여 개가 내년 말까지 줄 도산할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그러다 보니 ‘다음은 누구냐?’가 관심이 됐다. 도대체 어떤 금융 회사가 매각이나 도산의 주인공이 될 것이냐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결국 금융위기론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상황은 모두 비관적인가. 상당히 그렇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의 금융 감독 수장들이 금융위기설 해소를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헨리 폴슨 장관은 “두 국책 모기지 회사가 발행한 채권이 정상적으로 유통되도록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 심리적 안정책을 설파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콕스 증권거래위원장(SEC)은 “두 국책 모기지 회사와 골드만삭스 등 17개 대형 금융 회사 주식에 대해 차입 계약 없이 공매도(naked short selling)하는 것을 30일간 금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물론 이런 대책이 근본적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계기는 마련할 수 있다.여기에 2분기 기업 실적이 그런대로 괜찮게 나오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물론 전체적인 실적은 작년 동기에 비해 많이 줄었다. 특히 금융 회사의 손실은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기업들의 실적이 당초 월가의 예상치를 웃돌고 있다. 인텔 웰스파고 제너럴일렉트릭(GE) 알코아 존슨앤드존슨 이베이 등이 모두 작년보다 순이익이 줄었지만 월가의 기대치를 충족시켰다.그렇지만 이는 단순한 희망 사항으로 끝날 수 있다. 금융 회사의 손실이 예상보다 커지면 금융 위기감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 있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