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년간 철강 산업보다 인수·합병(M&A)이 활발하게 진행된 분야는 많지 않다. 수많은 철강 회사들이 ‘짝짓기’ 경쟁에 뛰어들었으며 업계의 지형도는 몇 년 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M&A 열기는 그 자체의 동력으로 국경과 대륙을 뛰어넘는 ‘메가 딜’을 엮어냈다. 대변동의 거센 흐름 앞에 기존 통념은 여지없이 무너졌다.지난 2007년 러시아 2위 철강 기업 에브라즈는 24억 달러에 미국 오리건스틸을 인수했다. 냉전 시대로 치면 ‘적국’의 기간 산업체를 사들인 것이다. 인도 타타스틸은 영국 브리티시스틸에 뿌리를 둔 유럽의 철강 명문 코러스를 손에 넣었다. 과거의 식민지 모국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격이다. 타타스틸은 코러스 인수로 세계 순위가 단숨에 51위에서 6위로 뛰었다. 러시아 1위 세베르스탈은 미국을 대표하는 US스틸을 넘보고 있고 US스틸은 미국 3위 철강 업체 AK스틸 인수를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이고 있다.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생존 게임이다.주요 철강 업체들이 모두 해외 업체에 넘어간 캐나다는 가장 극적인 사례다. 캐나다 최대 철강사인 스텔코는 11억 달러를 받고 US스틸에 매각됐다. 스텔코의 라이벌이던 도파스코는 아르셀로 미탈이 차지했다. 인도의 또 다른 철강 업체 에사르는 온타리오 주에 기반을 둔 알고마스틸을 선택했으며 스웨덴 철강사 SSAB는 77억 달러의 인수 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지불하고 입스코(Ipsco)를 인수했다. 순식간에 캐나다 철강 기업 4곳의 경영권이 모두 외국 업체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철강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모든 철강 기업이 합병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철강 회사는 지분이 분산돼 강력한 최대 주주가 없는 경우가 많아 M&A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또한 철광석에서 쇳물을 뽑아내고 철강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본 과정은 대부분의 제철소가 거의 유사하다. 전 세계 제철소를 모두 ‘장기판’ 위에 올리고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세계 철강 업계에 밀어닥친 이러한 대격변의 소용돌이는 아르셀로 미탈을 이끌고 있는 인도 출신의 락시미 미탈 회장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2006년 유럽이 자랑하는 철강 기업 아르셀로 인수를 성사시키며 단숨에 업계의 질서를 바꾸어 놓았다. 더구나 경영진의 거센 저항을 뚫고 적대적 M&A의 형태로 아르셀로를 손에 넣어 더 큰 충격을 줬다. 미탈 회장의 이런 공격적인 행보는 다른 철강사 CEO들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M&A의 희생양이 되지않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덩치 키우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2006년 초 처음 아르셀로 인수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미탈 회장은 무명에 가까웠다. 세계 1위로 올라선 미탈스틸을 이끌고 있었지만 국제무대에서는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주로 동구권과 제3세계의 낡은 제철소를 사들이며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의 갑작스런 선전포고에 놀란 프랑스 장관들은 미탈스틸의 본사가 인도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 몰라 허둥댈 정도였다. 아르셀로는 프랑스와 스페인, 룩셈부르크의 철강 회사들이 수십 년 동안의 통합 과정과 막대한 투자를 거쳐 탄생시킨 유럽의 간판 기업 중 하나였다.유럽의 철강 산업은 미국과 일본에 차례로 주도권을 넘겨 준 채 낡은 설비와 낮은 수익성으로 관심권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고급 철강 제품의 경쟁력과 기술력은 여전했다. 철강은 석탄과 함께 유럽연합(EU) 탄생의 모태가 된 남다른 의미가 있는 산업이기도 했다. 게다가 유럽은 영미식 자본주의와는 다른 독특한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 지역이다. 어느 쪽으로 보나 미탈 회장의 적대적 M&A 시도는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무모한 도전으로 비쳐졌다.하지만 상황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이후 과정은 M&A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어떤 기업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준다. 아르셀로의 경영진은 미탈 회장의 인수 제안에 대해 “우리가 만드는 것은 값비싼 향수고, 미탈이 만드는 것은 값싼 오데코롱(향수가 섞인 화장수)”이라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아르셀로는 즉각 역공에 나섰다. 우호 주주를 확보하고 러시아 최대 철강 업체인 세베르스탈을 ‘백기사’로 내세우는 결정타를 날렸다.하지만 주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상당수 주주들은 러시아 기업이 아르셀로의 최대 주주가 된다는 데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세베르스탈과 손을 잡은 아르셀로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도 모호했다. 반면 미탈 회장은 철강 산업의 글로벌화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주주들을 끌어들였다. 세베르스탈과의 합병에 대한 주주들의 반발이 걷잡을 수 없게 거세지자 아르셀로 경영진도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백기사 전략이 오히려 자충수가 된 것이다.지난 2월 13일 아르셀로 미탈의 합병 이후 첫해 실적이 공개됐다. 매출은 전년 대비 18.8% 늘어난 1052억 달러를 기록했다. 영업이익과 순이익도 25.4~30% 증가해 100억 달러를 훌쩍 넘었다. 모두 세계 철강 역사상 전례가 없는 기록이다.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실적 발표회장에 나선 미탈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사상 최대 실적은 아르셀로 미탈의 비즈니스 모델이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선언했다.아르셀로 미탈은 자신들을 ‘하나뿐인 진정한 글로벌 철강 기업’으로 묘사한다. 실제로 아르셀로 미탈은 4개 대륙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탈 회장이 아르셀로 인수를 처음 제안했을 때 프랑스 정부의 장관들은 그의 회사가 인도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미탈스틸은 사실상 국적이 없다. 런던에 본사 사무실이 있었지만 제철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미탈스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아르셀로 미탈이 합병에 대한 거부감을 그토록 잘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해 준다. 또한 아르셀로의 직원들은 수십 년 간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미탈 회장은 사양 산업 취급을 받던 철강 분야를 정보기술(IT)에 버금가는 역동적인 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실리콘 밸리에서나 가능한 성공 신화를 철강 산업에서 만들어 냈다. 인도 동부의 콜카타에서 성장기를 보낸 미탈 회장은 아버지가 인수한 소규모 전기로 업체에서 일하면서 처음 철강 산업과 연연을 맺었다. 인도에서의 사업에 한계를 느낀 그는 26세에 인도네시아에서 고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전기로 공장을 직접 운영하며 꿈을 키웠다. 미탈 회장의 길고긴 M&A 행진은 1989년 경영난에 빠진 트리니다드토바고의 국영 철강사 인수로 시작됐다. 그 이후 맹렬한 M&A를 통해 아르셀로 미탈이라는 거인을 탄생시켰다. 놀라운 속도로 고철 더미에서 세계 최대 철강 회사를 만들어낸 것이다.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두고 ‘미탈스럽다(Mittalic)’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혜성처럼 등장해 산업 전체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 놓는 것을 가리킨다.미탈 회장의 M&A에 대한 열정은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2006년 11월 미탈 회장은 한 강연에서 “과거 철강은 전략 산업이자 국가가 부여한 긍지의 표상이었지만 대부분 수익성은 낮았다”며 “2001년 극심한 불황은 이런 형태의 비즈니스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미국의 경우 2000년을 전후해 생산량 기준으로 40%에 해당하는 기업이 경영난에 몰려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미탈 회장은 “철강 산업이 경험한 최악의 위기였으며 대대적인 구조조정 없이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마지막 경고였다”고 말했다.철강 산업의 고민은 일차적으로 수요와 공급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상당수 제철소가 수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생산을 계속한다. 수많은 일자리가 걸린 제철소의 문을 닫거나 감산에 나선다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전후방 산업인 철광석이나 자동차, 조선 분야에서는 소수 거대 기업을 중심으로 한 시장 집중화가 강화돼 협상력에서도 밀리고 있다. ‘철강 공룡’이라는 아르셀로 미탈도 세계시장의 10%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철강 산업은 경기 변동성에 취약한 대표적인 업종으로 꼽혀 왔다. 호황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경기 침체가 시작되면 속수무책이다. 미탈 회장은 “항상 다음 침체 사이클이 언제 시작될지 자문한다”며 “과거 대형 업체들이 경험했던 급격한 파멸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여전하다”고 경고한다. M&A를 통한 대형화와 글로벌화는 경기 변동성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 규모를 키우면 효율적인 수급 통제가 가능해진다. 또한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으로 시장을 세분화해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다.세계 철강 업계의 M&A 움직임은 올 들어 숨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우선 아르셀로 미탈이 크고 작은 추가 인수 작업을 끊임없이 벌여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 기간 통합 작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중국 특수와 M&A 붐을 타고 기존 주요 철강 업체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는 것도 걸림돌이다.그러나 철강 업계의 M&A 전쟁이 막을 내렸다고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오히려 기존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앞으로 주목해야 할 태풍의 진원지는 중국이다. 박현성 포스코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국 정부도 국내 철강 업체들 간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시장을 열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시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은 국내 업체들 간의 M&A를 촉진하며 중국 철강사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중국 철강 산업의 급성장은 아르셀로 미탈에도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빠르게 규모를 키우고 있는 중국 철강사들이 고품질을 철강 제품을 싼 가격에 쏟아놓기 시작하면 아르셀로 미탈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탈 회장은 이미 중국에서 의미심장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미탈 회장은 2006년부터 일찌감치 중국 9위 철강 기업인 라이우의 지분 38%를 인수해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외국 기업의 자국 철강 기업 소유를 달가워하지 않는 중국 정부가 1년 넘게 승인을 해주지 않아 인수 계약은 자동 무산됐다. 그러자 미탈 회장은 전략을 바꿔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둥팡그룹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동팡그룹은 중국의 대표적 철광 지역인 허베이성에 진시제철소(중국 31위)를 소유하고 있다. 아르셀로 미탈은 지난해 말 둥팡그룹과 지분 73%를 17억 달러에 인수하는데 합의했다. 외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철강사를 인수한 것이다.미탈 회장의 M&A 공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그는 올 초 장샤오강 안강스틸 회장과 면담, 안강스틸의 지분 25%를 인수하겠다고 제의했다. 안강스틸은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형 철강 업체다. 장 회장은 미탈의 제안을 일단 거부했으나 1~2% 정도의 주식 매각에는 관심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미탈 회장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곳은 중국만이 아니다. 아르셀로 미탈은 전 세계 5개 대륙 중 4개 대륙에서 1위다. 아르셀로 미탈이 유일하게 주도권을 쥐고 있지 못한 곳은 아시아다. 바로 세계 순위 2~4위인 신일본제철, JFE, 포스코 등 빅3의 아성이기도 하다. 지난해 아르셀로 미탈의 유력한 M&A 타깃으로 거론되면서 이들 기업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미탈 회장이 거듭 인수 가능성을 부인하고 적대적 M&A 방어책이 잇따라 도입되면서 위기감은 가라앉았지만 불씨는 언제든 살아날 수 있다. 더구나 M&A 타깃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안심할 일도 아니다. 대격변의 시대에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이다.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기업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협찬: PO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