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아트의 만남. 최근 들어 신문 사회면을 비롯해 어디에선가는 한 번씩 접해 봤을법한 단어들의 조합이다. 어찌 보면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합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패션을 비롯한 휴대전화와 TV 같은 가전제품, 그리고 공공기관을 비롯한 아파트와 같은 주거 공간까지 아트와 서로 협업해 새로운 오마주(hommage: 감동 되살이)를 탄생시키고 있다.이렇듯 예술은 우리의 삶 가까이 들어와 있으며 어느 순간 아트는 패션을 잠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필자는 좀 더 품위 있는 남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점차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예술과 패션에 대해 얘기할까 한다.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패션이 아트와 협업하고, 아트가 무게와 권위를 버리고 서로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대략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패션의 트렌드라는 것이 워낙 돌고 도는지라 항상 무언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예술은 영감을 얻는 원천이자 반복되는 패션 주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탈출구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무엇보다 예술과 패션의 협업을 반기는 소비자들이 부쩍 늘어 그런 제품들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는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소비자들은 무엇 때문에 예술과 패션의 만남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유인 즉, 요즘 소비자들은 작은 제품 하나를 구입하더라도 단순한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닌, 브랜드에 담겨 있는 철학과 감성을 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브랜드들은 새로운 감성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과 협업하기 시작했고 이런 현상을 소비자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과거에도 이런 현상들은 존재해 왔다. 다만, 예전의 그런 현상들은 단순히 패션 디자이너들이 아티스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아 의상에 접목하는 소극적인 방식이었던데 반해 이제는 패션 디자이너가 아티스트와 작업을 한다든가, 아예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브랜드의 한 라인을 발표한다든가, 공격적인 아트와 패션이 만나게 된 것이다.유통 업체인 신세계 백화점(본점 본관)만 해도 쇼핑 공간의 동선을 이용해 쇼핑을 아트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아트월을 마련했다. 또한 에르메스(HERMES)는 세계에서 네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인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3층 아틀리에 아트 갤러리를 꾸미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은 쇼핑 공간에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해외 명품 브랜드의 경우 활발한 아트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브 생로랑(YSL)이나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의 2008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액션 페인팅 작품으로 유명한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 같은 추상 화가의 작품을 만날 수도 있고, 루이뷔통(LOUIS VUITTON)의 2008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아예 컬렉션 오프닝에 등장한 간호사 복장에서부터 가방 디자인에까지 모두 미국 태생의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의 작품들로 가득 채워지기도 했다.또한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와 협업해 유명한 모노그램을 재탄생시키기도 했으며 애니메이션(http://video.naver.com /2008041115 112677585)을 비롯해 하나의 컬렉션 라인을 구성하기도 했다. 매 시즌 혁신적 디자인과 콘셉트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프라다(PRADA) 또한 식물 동물 아이 유령 요정 등의 소재를 섹시한 분위기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아티스트 제임스 진(James Jean)과의 작업으로 동영상 비주얼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고, 동영상 비주얼에서는 프라다의 로고와 심벌을 이용하기도 했다.이렇듯 명품 브랜드들의 아트 마케팅이 활성화되고 있는 가운데 필자는 얼마 전 홍콩에서 샤넬의 ‘모바일 아트 전시’를 관람했다. 샤넬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패션과 예술의 접목을 시도했는데, 전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 20명이 샤넬의 2.55 백을 재해석한 작품들을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창조한 파빌리온에 전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 건축물은 300개의 패널과 75개의 골격으로 만들어 분리가 가능해 비행기로 옮겨 전시할 수 있는 아트 갤러리로, 지금은 도쿄로 옮겨져 또 다른 전시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 2년간 홍콩 도쿄를 거쳐 뉴욕 LA 런던 모스크바 파리 등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모바일 아트를 통해 우리는 패션과 아트의 지상 최고의 만남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패션의 본고장 파리에서 한국의 패션을 세계에 알리고 있으며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국의 스타 디자이너 이상봉은 소리꾼 장사익, 미술가 임옥상이 보내준 편지에서 필체들을 그대로 인용해 만든 한글 서체 디자인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은 동양을 대표한다’라는 찬사를 들은 바 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의 한글 서체 디자인이 새겨져 있는 컬렉션 작품 또한 한국 패션에서도 예술과의 조합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와 같이 예술과 패션의 만남은 이제 한국 패션, 그리고 한국의 남성복에서도 주목해야 할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예술은 이제 특정 계층만이 누리는 사치가 아니다. 한국의 남성들도 이제 패션처럼 우리의 일상생활로 들어온 예술을 좀 더 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미 음식의 경우 동서양의 요리가 서로 만나 퓨전 요리의 시대를 연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패션과 예술, 일과 놀이, 바야흐로 현대 사회는 퓨전을 넘어 컨버전스(Convergence) 시대가 됐다. 점점 일하는 비중이 늘어 감에 따라 대한민국 남성들은 공적인 만남과 사적인 만남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이제는 일과 휴식이라는 경계의 구분이 아니라 일을 노는 것처럼 신나게, 노는 것을 일하는 것처럼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남자들도 이제 패션뿐만 아니라 아트도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아트와 패션이 접목되고 있는 흐름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은 대한민국 남성들이 이제는 패션을 통한 아트를 이해함으로써 패션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시간이 왔음을 암시하고 있다.2010년 서울시는 예술의 도시로 거듭난다고 한다.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 파크가 동대문에 건립되고 세계 디자인 올림픽(WDO)이 서울에서 열리며 세계 모든 예술계의 거장들이 서울을 주제로 새롭게 재해석하게 된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남성들은 아트를 어떻게 먼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패션 속에 있는 아트를 먼저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아트를 만나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길일 것이다. 패션으로 아트를 말하고, 아트로 패션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패션과 아트가 주는 메시지를 곱씹어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1994년 호주 매쿼리대학 졸업. 95~96년 닥터마틴·스톰 마케팅. 2001년 홍보대행사 오피스에이치 설립. 각종 패션지 지큐·앙앙·바자 등에 칼럼 기고. 저서에 샴페인 에세이 ‘250,000,000버블 by 샴페인맨’이 있음.황의건·오피스에이치 대표이사 h@office-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