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천국’ 대치동 학원가
지하철 3호선 대치역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면 가장 먼저 우뚝 솟은 메가스터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대치동 학원가의 스타 강사로 시작해 국내 최대 온라인 교육 업체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손주은 사장의 성공 스토리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도 수많은 대치동 학원들은 또 다른 성공 신화를 꿈꾸며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다.대치역에서 은마아파트를 따라 한 블록 북쪽으로 올라가면 은마아파트 입구 사거리가 나온다. 바로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로 불리는 대치동 학원가의 중심 지역이다. 이곳에서 남북으로 뻗은 삼성로와 동서로 난 도곡동길이 교차하는데, 이들 양편에 크고 작은 학원들이 밀집해 있다.대치동은 학원 이름부터 이색적이다. ‘통하는 논술’, ‘개념의 힘’, ‘버팀목 수학’, ‘언어의 빛’ 등 저마다 톡톡 튀는 개성을 뽐낸다. 다른 곳에서 흔한 전통적인 학원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강남 지역에서는 드물게 3~5층 높이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점도 특이하다. 단독 건물을 갖고 있는 몇몇 대형 학원을 빼고는 각 층마다 서로 다른 학원의 간판이 걸려 있다.은마아파트 입구 사거리 인근에 있는 강남공인중개 정성윤 부장은 “학원을 늘리거나 줄이는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며 “올 초 ‘몰입식교육’ 이야기가 나온 후부터는 어학원들이 규모를 늘리거나 새로 문을 여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또 “대치동 학원가가 가장 붐빌 때는 방학 기간”이라며 “지방은 물론 해외에서도 학생들이 온다”고 귀띔했다.대치동에서는 학원만큼 흔한 게 없다. 부동산 업계에서 추산하는 대치동 학원 숫자는 대략 300여 개. 이는 통계청 조사 결과와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수치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서 학원이 가장 많은 곳은 대치 1동으로 모두 183개의 학원이 이 지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치 1~4동 가운데 1동이 최대 학원 밀집지인 걸 고려하면 이 지역 전체의 학원 숫자는 대략 300개 안팎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학원이 많다는 건 학부모 입장에서는 그만큼 학원 선택의 폭이 넓다는 걸 뜻한다. 자녀에게 꼭 필요하고 수준에 맞는 학원을 골라 보낼 수 있는 것이다.대치동 학원가의 경쟁력은 중소 규모의 전문 학원에서 나온다. 대형 학원들이 여러 과목을 두루 가르치는 종합 학원이라면 이들은 특정 과목에 전문화된 단과 학원이다. 대치동에서는 논술 수학 과학 등 수많은 전문 학원들이 대형 유명 학원에 눌리지 않고 경쟁한다. 그러다 보니 “전국에서 학원가의 유명 브랜드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 대치동”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대치동의 학부모들도 수강생이 많은 대형 학원보다 밀착 교육이 가능한 소규모 전문 학원을 더 선호한다.대치동 학원들의 생존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1998년부터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동아 김동아국어논술학원 원장은 “학원 간의 벤치마킹 경쟁도 워낙 치열하다”며 “다른 학원보다 한발이라도 앞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라고 말했다. 대치동에서 생존하려면 입시 제도 등 환경 변화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소규모 전문 학원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동아국어논술학원 두혜전 팀장은 “학원 규모가 커지면 교육 방식, 교재 등이 시스템화된다”며 “그렇게 되면 평균치 교육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변화하면서 민감한 부분을 치고 들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육 방식이나 내용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작으면서도 실속 있는’ 학원들이 경쟁력을 갖는 곳이 바로 대치동이다.전국에서 유능한 강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도 대치동의 강점 중 하나다. 대치동은 ‘사교육 1번지’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학원가에서 1급 강사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수 코스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곳에서 더 높은 연봉을 받는 강사들도 경력을 쌓기 위해 대치동을 선택한다.은마아파트 입구 사거리에서 만난 40대 주부 김모 씨는 자녀를 위해 온 가족이 대치동으로 이사한 경우다. 김 씨는 “고3인 아들이 특례 입학을 준비하는데 좋은 학원을 찾아 대치동으로 왔다”며 “교습 내용이나 학원비는 큰 차이가 없지만 아무래도 좋은 강사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현재 대치동에서 전세 아파트에 거주한다. 흔히 말하는 ‘대전살이(대치동 전세 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 씨는 “주변에 자녀를 위해 전세로 들어온 사례가 흔하다”며 “그러다 입시가 끝나면 빠져나간다”고 말한다. 김 씨도 올 입시가 끝나는 연말쯤 잠시 전세를 주고 이사 온 목동으로 돌아갈 계획이다.이처럼 대치동에는 자녀를 좀 더 좋은 학원에 보내기 위해 옮겨온 학부모가 적지 않다. 그만큼 학원 선택의 기준이 까다롭고 요구 수준도 높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원들 간의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질 수밖에 없다.대치동 학원가를 꿰뚫는 핵심 키워드는 ‘대입’이다. 모든 것이 대학 입시를 목표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대입 제도에 큰 폭의 변화가 예상돼 대치동 학원가에도 긴장감이 돌고 있다. 입시 경쟁의 최전선은 이미 대입에서 고입으로 내려온 지 오래라는 게 학원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올해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특목고 경쟁’과 ‘초등학생 내신’이다.김동아 원장은 “중등학원은 특목고반을 잡지 못하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특목고의 중요성이 커진 것은 조만간 대입에서 고교등급제가 허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고교등급제가 허용되면 어떤 고등학교를 나왔느냐에 따라 대학 입시에서 당락이 좌우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학부모들 사이에선 어찌 되든 일단 특목고에 들어가는 게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올해부터 전국 학생들이 같은 날 같은 문제로 시험을 치르는 전국 단위의 일제고사가 부활하면서 내신 관리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특히 초등학교의 경우 이러한 변화가 두드러진다. 기존 강남권 초등학생들은 특목중이나 특목고를 목표로 학습 계획을 짜왔다. 그러나 이제는 여기에 더해 내신 성적까지 관리해 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부 발 빠른 대치동 학원들은 기존의 국어 논술에 내신 관리를 더해 학부모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