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의 봄

월가에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한동안 성행하던 극도의 비관론이 서서히 가시는 분위기다. 오히려 ‘3가지 정점론’이나 ‘3가지 바닥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다름 아닌 ‘신용위기 정점론’ ‘경기 침체 정점론’‘인플레이션 정점론’이 그것이다. 신용위기는 정점을 지났으며, 경기 침체도 짧게 끝날 것으로 예상되고, 우려되는 인플레이션도 정점을 지나지 않았느냐는 것이 ‘3가지 정점론’의 골자다.이 중 신용위기 정점론은 공감대로 굳어지는 모습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헤지 펀드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월가의 내로라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이 이구동성으로 신용 위기가 최악을 지났다는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경기 침체에 대한 비관론도 점차 엷어지고 있다. 미 경기가 침체에 들어선 것은 분명하지만 예상과 달리 상반기를 고비로 하반기부터는 서서히 회복세에 들어설 것이란 전망이다. 말하자면 ‘가벼운 침체론(mild recession)’이 점차 대세를 형성해 가는 모양새다.‘인플레이션 정점론’은 아직 한창 공방이 이뤄지는 사안이다. 아직은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지났다는 시각이 소수다. 오히려 국제 유가의 고공행진과 중국 대지진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 행진이 맞물려 인플레이션 압력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4월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안정된 것으로 나타나 인플레이션 압력도 한풀 꺾이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오고 있다.지난 3월 베어스턴스 사태를 계기로 신용 위기가 최악을 지났다는 공감대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대형 금융 회사의 손실 증가세가 주춤하고 월가 자금 시장은 제법 활기찬 모습이다. 모기지 담보부 증권시장을 비롯한 파생상품 시장도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신용 위기설’은 쑥 들어간 상태다.한때 신용 위기에 대해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던 명망가들도 신용 위기 정점론에 동의하고 있다. 워런 버핏은 “월가의 신용 위기가 최악을 지난 것은 분명하다”고 진단했다. 그런가 하면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를 외치던 조지 소로스도 최근 들어선 “신용 위기는 최악을 지났지만 그 후폭풍에 따른 실물경제 위기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을 바꿨다. 어찌됐건, 신용 위기는 지났다는데 소로스도 동의한 셈이다.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도 마찬가지. “미 경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최대의 위기 상황에 들어섰다”고 주장하던 그린스펀은 최근 들어선 “신용 위기가 잦아들고 있다”고 수위를 낮췄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월가의 내로라하는 이코노미스트 5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신용 위기가 거의 끝났다’는 사람은 36%, ‘신용 위기가 절반을 지났다’는 사람은 62%로 거의 대다수가 신용 위기는 이제 막바지 단계라는데 동의했다.물론 그렇다고 신용 위기에 대한 경고음이 사라진 건 아니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여전히 “대형 투자은행은 물론 중소형 예금은행의 파산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신용 위기 경고론을 외치고 있다. 골드만삭스도 금융 회사들의 “서브프라임 관련 손실은 5000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으며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벤 버냉키 FRB 의장도 “금융시장이 아직 정상이 아니다”는 말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그렇지만 월가는 이제 신용 위기를 무서워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이 자체가 신용 위기가 최악을 지났다는 걸 방증한다.이제 미 경제가 침체 상태에 빠졌다는데 이론을 다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지만 경기 침체를 막연히 무서워하는 사람도 많이 없어졌다. “이번 경기 침체는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심각하며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많이 잦아들었다. 그 틈을 비집고 경기가 2분기를 고비로 침체 상태에서 탈출할 것이란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신용 평가사인 무디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존 론스키는 지난 4월만 하더라도 경기 침체 가능성을 90%로 예상했다. 그렇지만 5월 들어선 60%로 낮췄다. 경기 침체를 공식 판정하는 전미경제연구소(NBER) 의장인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개인적으로 경기 침체에 빠졌다고 생각하지만 심각할 것 같지는 않다”며 “FRB가 기준금리 인하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실제 최근 발표되는 경제지표는 예상보다 좋다. 4월 소매 매출은 전달보다 0.2% 줄었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제외할 경우 0.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휘발유 값이 갤런당 4달러에 육박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소비 심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경기 부양책으로 지급되고 있는 세금 환급액이 소비로 연결되고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또 0.6%(연율 기준)로 발표된 1분기 경제성장률도 상향 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그러다 보니 미 경제성장률은 2분기에 마이너스(혹은 0%대 성장)를 기록한 뒤 3분기부터는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성장률이 당분간 1%대에 그치겠지만 침체 상태에서 빨리 탈출한다는 것 자체가 추가 성장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데 이론이 없다.월가에서 새로운 논쟁거리로 등장한 게 인플레이션 정점론이다. 아직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자칫하면 ‘고물가-저성장 체제’인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감이 팽배한 건 사실이다. 사상 최고치 행진을 벌이는 국제 유가에다 중국 대지진으로 더욱 상승세를 타고 있는 곡물가 등 원자재값 은 이런 우려를 심화시키고 있다.실제 미국의 4월 중 수입 물가는 전달보다 1.8% 올랐다. 1년 전에 비하면 15.4% 상승해 지난 1982년 통계가 발표된 이후 가장 큰 폭의 연간 상승률을 보였다. 고유가가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면 결국 제조업의 제품가 인상으로 이어져 소비자물가를 끌어 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경기 침체보다 인플레이션 압력에 중점을 둔 통화 정책(긴축 정책)을 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게 되는 건 당연하다.그렇지만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지났다는 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재닛 옐런 샌프란시스코 연방은행 총재는 “인플레이션이 정점을 찍었고 앞으로 몇 달 동안 하락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옐런 총재가 인플레이션 정점론의 근거로 내세운 건 상품의 재고다. 그는 “만약 시세 차익을 목표로 하는 투기자들이 인플레이션 상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상품의 재고가 늘어나야 할 텐데, 지금까지 그런 증거는 없다”며 원유, 곡물 등에 대한 투기 세력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지속적으로 높일 것이라는 일각의 전망을 일축했다. 즉 실수요에 의해 국제 유가 등이 오른 만큼 수급만 조정되면 정상을 되찾을 것이란 전망이다.이런 주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4월 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예상을 밑돌았다.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2%,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1%를 각각 기록했다. 모두가 월가의 당초 예상치보다 낮은 수준이다. 여기에 고공행진을 하던 유가마저 주춤하는 기색이어서 인플레이션 정점론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물론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국제 유가 및 식료품 가격의 고공행진이 지속된다면 미국의 소비자물가도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게 국제 유가의 흐름이다. 최근 국제 유가가 상승한 배경은 투기 수요라기보다 실수요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런 만큼 수급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유가는 상승세를 탈 것이란 전망이 상당하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