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등하는 원유가

서부텍사스산원유(WTI)의 배럴당 연평균 가격은 2002년 26달러에서 2007년에는 73달러가 됐다. WTI 가격은 올해 들어서도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 지난 2월에 100달러를 넘어섰고 4월에 110달러, 5월에는 120달러를 넘어서면서 계속해서 사상 최고 가격을 경신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 판매되는 원유의 기준 가격이 되는 중동산 두바이 원유의 가격도 지난 3월 처음으로 100달러를 넘었고 5월 12일에 120.2달러로 사상 최고 가격을 기록했다.원유 가격 상승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빠듯한 세계 석유 수급 상황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세계 석유 수요는 중국과 아시아 개도국을 중심으로 계속 늘어나는 반면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2월의 임시총회와 3월의 정기총회에서 생산량 수준을 동결하기로 결정했다. 비OPEC 산유국의 공급은 노후화된 유전들의 생산이 감소하는데다 개발 및 생산비용 증가로 새로운 유전 생산이 지연되면서 저조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급격한 수요 증가는 OPEC 산유국의 여유 생산 능력, 즉 최대 생산 가능한 능력과 실제 생산량의 차이를 축소,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OPEC 산유국은 세계 석유 시장의 잔여 공급자로서 세계 석유 수요의 충족을 위해 비OPEC 산유국이 공급한 이후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급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OPEC의 생산 정책이나 OPEC가 보유한 여유 생산능력은 석유 시장 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런데 OPEC의 여유 생산 능력은 2004년 이후 하루 300만 배럴 아래에 머물러 세계 석유 수요의 5%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여유 생산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공급 차질이 발생했을 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원유 구매자들의 우려가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여기에 더해 미국의 금리 인하와 달러화 약세로 인해 투기성 자금들이 주식 및 채권 시장을 이탈해 원유 등 상품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국제 유가 상승세를 더욱 부추겼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경기 부양을 위해 올해 들어서만 4차례에 걸친 금리 인하 조치를 단행, 연방기금금리는 연초의 4.25%에서 2%로 낮아졌고 이로 인한 유동성 증가는 달러화 약세를 가속화했다. 유로화에 대한 달러 환율은 연초의 1.45달러에서 4월 하순 1.60달러까지 상승했다. 달러화 약세는 또한 산유국의 실질 구매력 저하로 이어져 유가의 상승 요인이 되기도 한다.최근에는 나이지리아 무장세력(MEND)의 셸(Shell)사 송유관 공격과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엑슨모빌(ExxonMobil)의 일시적인 공급 중단 등 산유국의 정정 불안에 의한 공급 차질 물량 확대가 가격 상승의 원인이 됐다.앞으로도 국제 원유 가격은 세계 석유 수급 상황은 물론 OPEC의 생산 정책, 달러화의 가치, 투기 자금의 움직임, 주식시장 상황, 지정학적 사건, 기후 여건, 그리고 여타 석유 시설과 관련한 사고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최근 유가가 급등하면서 연내에 유가가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른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유가는 지정학적 불안이 심화되지 않으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안정세를 보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경기 침체와 함께 세계 석유 수요 증가세가 다소 둔화되고 달러화 약세도 진정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올해 유가 급등의 주요 요인으로 지목되는 달러화 약세는 FRB의 추가적인 금리 인하가 당분간 없을 것으로 예상돼 더 이상의 약세 행진이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빠듯한 수급 상황과 OPEC의 고유가 정책에 따른 가격의 하방경직성으로 인해 올해 WTI의 연평균 가격은 100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가 지난해 평균가격에 비해 또다시 30달러 이상 오른다는 것이다.유가 상승은 먼저 제반 물가를 높여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된다. 다시 물가 상승은 실질 소득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와 가계 소비 지출이 위축된다. 또한 물가 상승은 제조 원가를 높이기 때문에 투자 지출이 위축된다. 소비와 투자의 감소는 결국 경제성장률 둔화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 위기를 경험한 이후 유가 상승은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돼 왔고 유가 상승으로 인한 에너지 비용의 증가는 경제 성장을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인식돼 왔다.다행스러운 것은 그동안 고유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세계 경제지표는 비교적 안정돼 있었다. 세계 경제성장률은 2004년 이후 5% 내외를 유지해 왔고 이런 높은 경제성장률 아래서도 물가상승률은 낮은 편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총생산(GDP)은 4~5%의 성장을 계속해 왔고 소비자물가도 지난해까지는 2%대에 머물렀다.1970년대 두 차례 석유 위기 때와 달리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가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비해 유가의 경제적 영향이 상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가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이전돼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산업의 비중이 커졌고 에너지의 이용 효율도 높아져 생산 단위당 에너지 사용량이 줄었다. 선진국은 GDP 단위당 에너지 사용량이 1970년대의 절반 수준이고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도 줄었다. 우리나라는 비록 GDP 단위당 에너지 사용량은 크게 줄지 않았으나 석유를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해 에너지소비 중 석유의 비율은 2차 석유 위기시의 61%에서 현재는 44%로 줄었다. 이 밖에도 고유가의 영향이 감소한 이유로 과거와 달리 세계화의 진전으로 중국이 저렴한 상품을 세계시장에 공급해 인플레이션 압력이 완화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그렇지만 유가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계속되는 유가 상승이 소비 심리나 투자 심리를 악화시키면 경제는 빠른 속도로 불황 상태로 빠져 들 수 있기 때문이다.지금은 고유가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 방향과 정책 수단을 새롭게 점검할 시점이다. 물가 정책의 경우 물가 안정화 목표를 세워 유가 상승이 일반 물가 상승으로 발전하는 2차적인 파급효과를 억제해야 한다. 하지만 유류세 인하는 가격 변화에 따른 수요 조절 기능을 방해해 에너지 절약 노력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에너지 정책에서는 석유 정제 시설의 고도화, 해외 석유 개발의 확대, 에너지 소비 효율 제고,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분해 시설과 탈황 시설 등 고도화 설비의 확대는 세계적인 원유의 중질·고유황화 경향과 정제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질·저유황 석유 제품의 수출을 늘려 석유 정제업의 부가가치를 제고하는 방안이다. 해외 석유개발을 위해서는 자원 개발 회사의 대형화와 자금 동원력을 확대할 수 있는 방안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석유 소비가 많은 수송부문을 중심으로 에너지 소비 효율도 제고해야 한다. 하이브리드 자동차 보급을 통한 연비 개선, 경차 보급, 화물차 공차율 저감, 첨단 교통 체계 구축, 대중교통 이용 체계의 개선 등은 소비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들이다.이달석·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