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을 위한 쇼핑 가이드

생활권이 강남이다 보니 시내 중심에 있는 백화점에 들를 기회가 없던 필자는 오랜만에 삼청동을 찾았다가 재미있는 행사가 있어 명동에 있는 신세계 백화점을 찾았다.신세계 백화점에서는 ‘삼청동@신세계’라는 이름의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예스러움을 간직한 한옥 건물의 전통미와 갤러리, 카페의 현대미가 조화돼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공간인 삼청동의 여러 가게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호젓한 산책로와 화랑, 박물관, 골동품 가게가 골목 사이에 숨어 있어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삼청동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신세계 신관의 옥상에서는 재활용품으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는 정크 밴드와 페이스 페인팅, 저글링과 석고상 퍼포먼스도 볼 수 있어 쇼핑과 문화생활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신나게 뛰어 노는 어린 아이들과 그것을 보며 즐거워하는 (필자보다 어린) 젊은 엄마, 아빠의 모습이 이전 백화점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이러한 문화 행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참신했던 행사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신세계 백화점에 있던 남성들의 모습은 예전 남성들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본래 백화점에 있는 대부분의 남성들 모습이란 여성들이 쇼핑한 짐을 잔뜩 들고 의욕 없는 얼굴로 서 있는 것이었다. 여자 친구나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서 백화점에 오긴 왔는데 내가 여긴 왜 왔나 하는 심드렁한 얼굴로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여자들에게는 이렇게 즐겁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공간이 남자들에게는 지루하고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었다.그런데 이제 남자들에게도 백화점은 과중한 업무와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도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개념을 엿볼 수 있어 신선했다. 아이와 부인과 함께 쇼핑 공간에서 이방인이 아닌 쇼핑 외에 그 공간이 제공하고 있는 문화 콘텐츠를 여유롭게 즐기거나 다른 일을 하며 부인의 쇼핑을 기다릴 수 있어서 이제 더 이상 백화점은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아니었다.필자는 전형적인 386세대다. 386세대는 남자의 역할과 여자의 역할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어서 남자는 쉽게 울어서도 안 되고 부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며 피부나 옷 등 미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지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세대다. 이러한 시대적 통념 속에서 한국의 남성들은 본인의 선택의 여지없이 마초로 만들어져 왔다. 하지만 요즘 남자 후배들을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선의 비늘 모양이 그려져 있는 그릇에 내놓아진 생선 구이를 보며 그릇 때문에 생선이 더 맛있어 보인다고 말하는 섬세한 미적 감각을 지닌 후배들도 필자 주변에는 있으며 상대가 어떤 향의 향수를 쓰는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자 후배들도 많다. 남성들도 이제는 아름다운 것에 감탄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후배들에게 쇼핑이란 개념도 386세대인 내가 지니고 있는 그 쇼핑 개념과는 다를 것이다.지금까지 쇼핑과 남자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인이나 여자 친구가 쇼핑의 욕구를 불태우면 “이번에는 또 얼마가 깨지려나”라며 가슴이 철렁 하는 것이 남성의 쇼핑에 대한 개념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남성과 가족을 배려하는 쇼핑 문화가 고급 유통에서부터 자리 잡으면서 남성들도 쇼핑의 행위를 하나의 놀이 문화로 받아들이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모르는 것처럼 남성들을 배려한 쇼핑 문화의 탄생이 먼저인지 남성들의 쇼핑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점은 이제 남성들도 쇼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됐다는 점이다.일본에는 ‘이세탄 멘즈’나 ‘마루이 맨’과 같은 남성들만을 위한 남성 백화점이 수십 년 전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해 왔다. 우리나라의 대형 백화점과 같은 크기의 매장 안에는 남성들만을 위한 아이템이 건물 전체를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일본에 가서 이 매장에 들렀을 때 이러한 남성 백화점에 수백 가지 컬러의 양말이 있는 것을 보고 필자는 거의 쇼크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 남자 양말은 ‘BYC’ 같은 속옷 브랜드에서 사은품으로 주는 검정색과 흰색 면양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남성들도 이렇게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고 쇼핑을 즐길 수 있는 일본의 백화점은 필자에게 마법의 성과 같았다. 그 후 쇼핑은 나의 아이덴티티를 탐구하고 찾아내는 일종의 행위이며 선택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우리나라에는 아직 일본만큼 남성들을 위한 쇼핑 공간이 갖춰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수입 멀티숍으로 유행을 리드하고 있는 분더숍 맨(BOON THE SHOP MEN)이나 차세대 멀티숍으로 떠오르는 무이(MUE), 텐 코르소코모(10 CORSOCOMO) 등이 점점 남성들을 위한 쇼핑 공간을 늘려가고 있다.특히 청담동에 자리 잡고 있는 분더숍 맨은 숍 전체를 독립적으로 남성 브랜드들로만 구성해 트렌드 세터 남성들의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았다. 분더숍 맨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해볼 수 없는 외국의 유명 브랜드들을 만나볼 수 있어 패션 피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지하에는 클럽 웨어, 1층에는 갤러리 같은 느낌의 옷, 2층은 트래디셔널한 슈트로 층마다 다른 느낌의 쇼핑 공간으로 구성,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한국 남성들에게 쇼핑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남성들은 친구들끼리 만나면 할 일이 없다고 투덜거린다. 남성들끼리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뭐하고, 영화를 보는 것도 뭐하고, 스파게티를 먹는 것도 뭐하고…. 그래서 남자들은 매일 만나기만 하면 술을 마시거나 아무 대화 업이 반사적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는 스케줄로 한정돼 있다. 여자 친구라도 생겨야 미술관 전시회도 보러 가고 (아니, 끌려가고), 콘서트도 보러 가고, 쇼핑도 한다는 것이다.하지만 남자들이여, 이제 이러한 틀에 박힌 스케줄에서 벗어나 진화한 쇼핑 공간의 쇼핑 문화를 한번 받아들여 보자. 그곳에는 자신의 외모를 한층 업그레이드해 줄 멋있는 옷도 있고, 맛있는 음식과 신나는 음악도 있다.또한 그림이나 조각 등 여유롭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이러한 것들을 더 여유롭게 즐기고 있는 자기 자신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남성이 이해해야 할 새로운 쇼핑의 정의다.이러한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남성을 위한 쇼핑 장소 리스트를 공개하니 이번 주말에 당신의 친구들과 들러보도록 하자.황의건·오피스에이치 대표이사 h@office-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