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된 달러 약세

‘달러화 약세’가 결국 효자가 됐다. 달러화 약세로 미국 기업들의 1분기 실적이 예상을 웃돌고 있다. 수출과 해외 매출이 늘어나서다. 이에 따라 ‘우려’ 속에 출발했던 1분기 어닝 시즌은 ‘안도’ 모드로 급속히 전환 중이다. 어닝 시즌에 대한 안도감이 퍼짐에 따라 ‘뉴욕 증시 바닥론’이 한층 힘을 받는 분위기다. 일부 월가 전문가들은 아예 대놓고 ‘뉴욕 증시 바닥’을 선언하고 있다.물론 아직은 섣부르다. 경기가 침체 상태에 빠져든 것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경기 침체가 빨리 끝나면 관계없다. 그렇지만 일부의 예상대로 경기 침체가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심각하게 진행될 경우 현재의 ‘뉴욕 증시 바닥론’은 베어마켓 랠리의 한 부분에 불과할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가 투자자들은 부쩍 힘을 내고 있다. 어찌됐건 눈앞에 보이는 성적이 괜찮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4월 30일 기준금리를 내리면 금리 인하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더 이상 금리를 내리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근거에서다.이런 분위기 반전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달러화 약세도 주된 요인이다. FRB의 잇따른 금리 인하는 급격한 달러화 약세로 이어졌다. 이는 다시 미국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강화시켰고 결국 해외 매출이 많은 미국 기업들의 실적은 미국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양호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가 보다.지난 4월 7일 1분기 어닝 시즌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전망은 ‘우울’ 그 자체였다. 알코아의 순이익이 50% 이상 감소해 불길한 어닝 시즌을 예고했다. 지난 4월 11일에는 ‘미국 경제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제너럴일렉트릭(GE)이 5년 만에 처음으로 분기 순이익이 감소했다고 발표해 ‘어닝 쇼크’를 가져왔다.GE는 미국 경기의 종합체다. 만들지 않는 게 없다. 더욱이 해외 매출이 50%를 넘어설 정도로 달러화 약세의 수혜도 톡톡히 봐 왔다. 이런 GE가 흔들리자 ‘달러화 약세도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이런 분위기를 바꾸는 선봉을 정보기술(IT) 업체가 섰다. 지난 4월 15일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인텔은 1분기 순이익이 14억4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12% 감소했으나 매출액은 9.3%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순이익은 월가 예상치와 부합했으며 매출액은 예상치를 웃돌았다. 인텔은 2분기 매출 전망치도 상향 조정했다. 미국 매출은 부진하지만 해외 매출이 호조를 보인 때문이었다. 이는 결국 미 경기 침체의 영향을 비켜 가는 것으로 해석됐다.인텔에서 시작한 IT 업체의 실적 호조 바람은 IBM 이베이 구글로 이어졌다. IBM은 순이익이 전년 동기보다 26% 증가했다고 발표해 ‘어닝 서프라이즈’를 연출했다. 이베이도 전년 동기보다 22% 증가한 4억597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동안 성장성 정체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냈던 ‘인터넷 황제’ 구글도 15억4000만 달러(주당 4.84달러)의 순이익으로 월가의 예상치(4.52달러)를 넘어섰다. 대형 제조업체들도 신바람을 냈다. 코카콜라를 비롯해 캐터필러 허니웰 존슨앤드존슨 등 미국의 간판 제조업체들의 실적이 모두 예상치를 웃돌았다.요인은 달러화 약세였다. 달러화 약세로 해외 매출이 호조를 보인 덕분이었다. 구글 IBM 인텔 등 IT 기업은 물론 코카콜라와 존슨앤드존슨 등 제조업체들도 이구동성으로 해외시장 판매 호조로 좋은 실적을 냈다고 밝혔다. IBM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매출이 16% 증가했다. 만일 달러화 약세를 감안하지 않을 경우 이들 지역 매출액 증가율은 4%에 불과하다.달러화는 작년부터 가파르게 약세를 보이고 있다. 올 들어 지난 1분기 동안 6개 주요 통화에 대해 6.1% 절하됐다. 유로화에 대해선 8.3% 떨어졌다. 일본 엔화에 대해선 7.1% 내렸다. 통화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물건을 팔더라도 달러화로 환산하는 금액은 절하 폭 만큼 많아진다. 수출 기업은 가격 경쟁력이 생겨 수출도 늘어난다.실제 미국의 수출은 달러화 약세 전환 이후 증가하는 추세다. 작년 1월 1271억 달러였던 수출액은 작년 9월 1412억 달러로 불어났다. 작년 말에는 1458억 달러로 늘어난데 이어 지난 2월에는 1513억 달러로 15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달러화 약세가 기업들을 살리고, 기업들의 생각보다 양호한 실적은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감을 상당히 덜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뭐니 뭐니 해도 어닝 시즌의 핵심은 금융주다. 어떤 실적을 내느냐가 어닝 시즌은 물론 뉴욕 증시 전체의 향방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돼 왔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역시나’였다. 예상대로 실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예상대로’였다. 예상을 뛰어넘는 ‘어닝 쇼크’를 금융주는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신용 위기 정점 통과론’과 ‘뉴욕 증시 바닥론’은 더욱 탄력을 받는 분위기다.지난 3월 실적 발표를 끝낸 골드만삭스와 리먼브러더스 등 대형 투자은행들의 실적은 그런대로 양호했다. 관심의 초점은 4월 실적을 발표하는 씨티그룹과 메릴린치에 모아졌다. 두 회사는 작년 4분기 중 각각 1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적자를 낸 상태라 이들의 실적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씨티그룹은 51억1000만 달러(주당 1.02달러)의 적자를 내 월가 전망치보다 나빴다. 그러나 큰 폭의 실적 악화를 경고했던 메릴린치의 전망치(주당 1.66달러 적자)보다는 훨씬 양호해 주가는 오히려 상승했다. 메릴린치도 월가 예상보다 많은 적자를 냈으나 차이는 크지 않았다. JP모건체이스와 웰스파고 등은 오히려 예상보다 좋은 성적표를 내놨다.그러다 보니 월가에는 한숨 돌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대형 투자은행에 이어 대형 금융회사들의 실적이 최악은 넘긴 것 같다는 인식에서다. 비록 중소 규모 은행 및 금융회사들이 도산에 직면할 것이라는 분석이 잇따르고 있으나 시장에 미치는 파장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큰 파괴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 3월 베어스턴스 사태를 계기로 형성되던 뉴욕 증시 바닥론은 더욱 견조해지고 있다. ‘이미 바닥을 쳤다’는 분석이 상당하다. 경제 전문 사이트인 마켓워치는 증시는 경제가 회복되기 수개월 전부터 회복세를 보인다며 현재 뉴욕 증시는 바닥권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마켓워치는 그 이유로 우선 월가에 부정적인 투자 심리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시장에 부정적인 태도가 강할 경우 증시는 오히려 반등했다는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다. 실제 작년 가을 시장 참가자의 60%가 시장에 대해 긍정적인 심리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지난 3월 중순에는 30.9%로 낮아졌다.52주 최저치를 경신하는 종목이 많아지는 것도 추세 전환의 신호로 볼 수 있다고 마켓워치는 지적했다. 이미 지난 2, 3월 급락기를 거치는 동안 뉴욕증권거래소에는 52주 최저치를 경신한 종목이 무더기로 발생했다. 이를 감안하면 S&P500지수가 조만간 바닥을 형성한 후 연말쯤 1500~1550선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경기 침체의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소비 관련 주식이 바닥권에 진입한 것도 뉴욕 증시의 바닥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됐다. 최근 경기 침체를 반영해 미국 내 소비가 줄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부진할 따름이다. 소비 관련주들은 소비 부진을 이미 주가에 반영했다. 지난 1년 동안 19% 급락해 52주 최저치에 근접한 상태다. 소비 관련주는 경기 침체 때 가장 먼저 떨어지는 종목이지만 증시의 추세 전환 때 가장 먼저 오르는 종목이기도 할 정도로 경기에 민감하다. 따라서 소비 관련주가 바닥을 지났다는 것은 결국 뉴욕 증시가 바닥을 지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고 마켓워치는 밝혔다.하영춘·한국경제 뉴욕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