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에 대한 외국인들의 생각은 실제와 다른 경우가 참 많아요. 가장 큰 오해는 남미의 다른 나라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는 겁니다. 칠레에 직접 와 보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태반이죠.”한국의 KOTRA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정부 조직인 프로 칠레(Pro Chile)의 패트리시아 마타 대외 홍보 담당자의 말이다.사실이 그랬다. 서울에서 30시간이나 날아와 도착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시의 첫 인상은 오히려 서유럽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거리는 깨끗했고 시민들의 표정엔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났다. 도시는 밤에도 누구나 안심하고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 보였다.“칠레에 오기 전에 다른 남미 국가를 둘러봤다면 칠레가 얼마나 선진적인지 단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교민의 말도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칠레는 자타가 공인하는 남미의 경제 선진국이다. 몇 가지 수치만 봐도 칠레 경제의 역동성을 짐작하는 데 충분하다. 수출과 수입 모두 4~5년 전에 비해 2~3배나 증가했고 2005년 7000달러 수준이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도 2007년 갑절인 1만4400달러로 불어났다. 최근 20년간 연평균 GDP 성장률은 6~7%에 달한다.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지난해 칠레의 국가 신용 등급을 1단계 상향 조정하고 국제경영개발원(IMD)의 국가경쟁력지수에선 세계 26위를 기록하는 등 칠레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성은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된다.따지고 보면 칠레 경제의 발전은 수수께끼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지리적으로 칠레는 ‘남미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른 지역과 ‘격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북쪽은 사막, 동쪽은 안데스 산맥, 서쪽은 태평양으로 사방이 막혀 있다. 인구는 고작 1600만 명에 불과하다. 경제 발전의 핵심 요소인 선진 기술도 거의 없다.하지만 칠레엔 이 모든 악재를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경제 발전에 대한 칠레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그것이다. 칠레 정부는 1980년대부터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고 사회간접자본(SOC)을 확충하는 등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특히 공무원들의 투명성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국가부패지수에서 2006년 칠레는 20위(한국은 42위)에 올랐다.투명성과 효율성으로 무장한 칠레 정부는 경제 발전의 해답을 ‘지리적 고립’을 역이용하는 것에서 구했다.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국토는 해상 무역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축복’이었다. 단지 어떻게 무역을 활성화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칠레는 ‘자유 무역’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냈다.카를로스 에두아르두 메나 외국인투자위원회 위원장은 “칠레는 전 세계 57개국과 FTA를 체결한 세계 최고의 FTA 선진국”이라며 “완전 개방 시장이어서 라틴아메리카로 진출하려는 국가와 기업이 교두보로 삼을 만한 나라”라고 말했다. 칠레의 낮은 관세를 이용해 남미 지역에 상품을 수출하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실제로 칠레에 대한 외국인들의 직접 투자 금액은 매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2003년 43억 달러 수준이던 것이 지난해 154억 달러로 무려 4배 가까이 불어난 것이다.흥미로운 사실은 외국인 투자를 살펴보면 칠레 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투자하는 분야는 전체의 32.7%를 차지하는 광업이다. 그만큼 칠레의 지하자원이 매력적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광업은 칠레의 주력 산업이다. 특히 구리는 전체 수출의 66.2%(2006년 기준)에 이른다. 생산량 기준으로 칠레는 세계 최대(세계 생산량의 11%)의 구리 대국이다.칠레 구리 산업의 경쟁력은 막대한 매장량뿐만이 아니다. 효율성 측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파운드당 생산비가 39.7센트로 45.6센트로 세계 2위인 프로포트맥모란사보다 한층 효과적인 시스템과 기술을 갖추고 있다. 50%를 상회하는 매출 이익률(gross margin)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저비용 덕이 크다. 외국인들이 칠레의 광업에 투자를 늘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셈이다.칠레구리공사(CODELCO)의 마리아 파즈 오르테가 IR이사는 “칠레구리공사는 꾸준한 투자를 통해 기술 혁신과 저비용 구조를 갖춰나가고 있다”면서 “인도 등 새로운 수요처가 등장하고 있어 구리 산업의 전망은 매우 밝은 편”이라고 기대했다.최대 먹을거리인 구리 산업의 미래가 낙관적인 것은 칠레 경제에 분명 큰 힘이 되고 있다. 하지만 구리 산업의 비중이 너무 높은 것은 해결돼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산업의 포트폴리오가 한 분야에 집중돼 있는 만큼 경제 리스크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칠레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구리 외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칠레 정부의 기대를 받고 있는 산업은 농·축·수산업이다. 포도를 비롯한 과일과 와인, 돼지고기, 연어 등이 특히 그렇다. 이들 산업에서도 칠레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과일의 경우 남반구에 위치하기 때문에 주요 소비 지역인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여서 시장 개척이 유리하다는점, 일조량이 풍부하다는 점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 특히 포도 재배에 유리한 기후여서 와인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와인 업계 관계자들은 칠레의 와인은 가격 대비 세계 최고의 품질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브랜드를 가린 채 평가해 보면 프랑스나 이탈리아산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르네 메리노 블랑코 칠레와인협회장은 칠레 와인 산업은 매년 크게 발전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 수출은 지난해 97.3%나 급증하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며 “칠레는 우수한 와인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고 있는 데다 칠레 정부가 세계 최다의 FTA를 체결해 수출 여건이 좋은 것도 좋은 성적의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축산물 생산을 위한 환경도 좋다. 축산업 최대의 적은 전염병 등 위생 관련 악재인데 칠레의 경우 이런 위험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낮다. 지리적으로 고립돼 있어 외부의 병균이 유입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여기에 깐깐하기로 이름 높은 칠레 검역청이 수출되는 축산물을 일일이 검사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매우 높다. 지금까지 칠레산 축산물이 물의를 일으킨 적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고 관계자들은 강조한다.칠레 정부의 전략은 1970년대 한국의 그것과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 몇몇 전략 산업에 자원을 집중, 육성하는 전략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것처럼 칠레도 ‘선택과 집중’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한국이 중화학공업을 간판으로 내세운 반면 칠레는 광업과 농축수산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물론 제조업 없는 국가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유고 라바도스 몬테스 경제부 장관은 “칠레의 산업 구조가 단순해서 리스크가 크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10~2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다양화됐다”며 “혁신의 관건은 가치를 높이는 것이므로 산업의 다양성을 무작정 추구하기보다 이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산업을 한층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칠레 정부의 전략”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농업에선 뉴질랜드를 벤치마크하고 있으며 아일랜드와 한국 핀란드 등은 기술 혁신의 모델로 삼고 있다”고 덧붙였다.또 하나 다른 점은 칠레 정부는 특정 업체에 대한 지원을 하기보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역량을 모은다는 점이다. 투자와 기술 혁신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몫이지 정부의 몫이 아니라는 얘기다.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특혜를 주는 일도 없다. 내국 기업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다만 외국 기업이라도 차별받지 않는 시스템을 제공할 뿐이라는 설명이다.칠레 정부와 기업인, 국민들은 지금까지 칠레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시장의 개방과 기업의 경쟁을 통한 발전 전략이 20여 년 동안 효과를 내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최근의 FTA 협상에 대한 칠레 의회의 지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6년 대중국 FTA와 지난해 대일본 FTA 협상에 의회가 ‘만장일치’의 비준으로 화답한 것이다. 최소한 FTA에 관한 한 칠레는 ‘한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특히 한국과 FTA는 최대 성공작이라고 칠레 정부는 평가한다. FTA 이후 양국 간 무역이 몇 배나 불어나며 ‘윈윈’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칠레 FTA 4년 동안 한국의 대칠레 수출액은 7억 달러에서 31억 달러로 4배 이상 불어났고 수입액은 18억 달러에서 39억 달러로 2배가량 증가했다. 외교통상부의 카를로스 푸르체 국장은 “칠레의 수출 품목은 3000여 개인데 한국에 수출하는 것은 600개 내외”라며 “한국 측이 동의하면 교역 품목을 늘리는 한편 서비스 관광 교육 등으로 FTA를 확대해 나갈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현대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칠레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실적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현대차의 약진이 눈에 띈다. 칠레 자동차 시장에서 한국산 자동차의 점유율은 2006년 25.7%에서 2007년 29.3%로 매년 높아지고 있다. 이 중 현대차는 승용차(5위), SUV(투산 1위, 산타페 5위), 상용차(H-1 2위, 포터 5위) 등 모든 부문에서 상위권에 올라 있다.현대차의 선전은 FTA의 효과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FTA로 가격 경쟁력이 생겼다는 이유다. 하지만 정작 현대차를 판매하는 길데마이스터의 리카르도 레스만 회장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그는 “FTA를 체결한 다른 국가의 경우 이렇다 할 성장을 하지 못했다”며 “현대차는 FTA 이전에 유통망과 애프터서비스망을 확충하는 등 사전 준비에 만전을 기한 것이 주효했다”고 강조했다. FTA가 만능은 아니며 무엇보다 철저한 준비가 승부를 가른다는 얘기다.리카르도 레스만 회장의 지적에 한국 기업 관계자들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관세 철폐로 인한 가격 경쟁력은 판매 확충에 도움은 되지만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제조업의 경우엔 칠레 진출에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우선 인구 1600만 명의 칠레 시장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칠레를 전진기지 삼아 남미 시장을 노리는 전략도 다시 한 번 짚어봐야 한다고 덧붙인다. 안데스 산맥에 막힌 데다 남미의 끝에 위치한 칠레가 물류나 생산의 거점이 되기는 힘들다는 얘기다.그렇다고 칠레 진출을 반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칠레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산업이나 전력이나 인프라 등 칠레 내수 시장을 노린 사업 등 선별적으로 접근하면 기회가 많을 것이란 설명이다. 특히 칠레 정부는 대단히 높은 투명성과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기업하는데 신경 쓸 일이 적다고 말한다. 여기에 칠레의 근면하고 책임감 있는 국민성도 기업을 하는데 우호적이라고 덧붙인다.취재=변형주 기자(칠레 산티아고)·이홍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