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분야 1등 기업 영향력 갈수록 ‘쑥쑥’
지난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HP가 주최하고 전 세계 기자들과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2008 모빌리티 서밋’이 개최됐다. 올해 3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HP가 PC 부문 기술 및 신제품을 선보이는 자리였다.2006년 3분기부터 전 세계 PC 시장 1위에 올라선 HP는 2위 델과의 격차를 갈수록 넓히고 있다. HP는 PC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할 신제품을 내놓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 걸친 유통망과 고른 품질, 적당한 가격, 믿을만한 애프터서비스(AS)를 바탕으로 PC 부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HP가 PC 시장에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최근 변화된 정보기술(IT) 환경을 대변해 준다. 전통적으로 제조업 분야에서는 최소한 3개 업체가 비슷한 점유율로 경쟁을 벌여 왔지만 최근 IT 제조업에선 1위가 대부분 시장을 독식하는 체제로 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터넷 포털 등이나 소프트웨어 부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IT 제조업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것이다.1등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는 이유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공유되고 IT 제품이 공산품화하면서 성능이 뛰어난 비싼 제품보다 ‘괜찮은’ 품질과 적당한 가격 밸런스를 갖춘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것이 기업의 경쟁력이 됐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애플의 아이팟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10년 전만 해도 국내에 300여 개의 MP3 업체가 있었다. 물론 이 중에는 무늬만 MP3 업체도 있었지만 최소 50여 개의 제조사가 저마다 개성 있는 MP3를 개발해 왔다. 이들은 MP3에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을 적용해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이러는 와중에 애플이 원가 구조를 혁신적으로 낮춘 ‘아이팟’을 내놓고 시장을 장악했다. MP3 한 모델의 한 달 판매량은 1000~1만 대다. 업계에서는 1만 대가 넘으면 대박 제품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한 달에 100만 대가 넘게 팔리는 아이팟과는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아이팟은 강력한 가격 경쟁력도 가지고 있다. 애플은 MP3에 들어가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 플래시메모리, 배터리 등을 100만 대에서 1000만 대 이상 주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부품을 1000개 단위로 구입할 때와 100만 개 단위로 살 때는 원가 체계 자체가 달라진다. 이른바 ‘바잉파워(Buying Power)’가 생기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부품을 주문하고 공급받는 수준이 아니라 원하는 형태로 부품을 원하는 수량, 종류를 비롯해 제조 일정까지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삼성전자에 아이팟터치에 맞는 칩을 개발해 달라고 하거나 맥북에어에 맞는 CPU를 인텔에 주문 제작하는 일 등이 가능해진다.업계 1위, 바잉파워를 갖춘 IT 업체들은 해당 산업을 이끄는 역할을 자처한다. 자신들이 제시한 로드맵에 따라 다른 업체들이 동조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각 분야 1등 기업들은 정기적으로 세계적인 콘퍼런스를 열어 업계 주도권을 쥐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애플 등은 매년 개발자 회의를 성대하게 개최하고 있으며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프트웨어 업체들도 정기적으로 콘퍼런스를 진행해 관련 업계 트렌드를 제시한다.애플은 매년 개발자 회의를 통해 신제품을 깜짝 발표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발표 전에 어떤 정보도 노출하지 않는 애플은 이런 ‘신비주의 전략’으로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했다.인텔도 봄과 가을 인텔개발자회의(IDF)에서 향후 컴퓨팅 트렌드와 신제품을 설명하는 자리를 갖는다. 인텔은 IDF를 통해 펜티엄 시리즈, 센트리노 시리즈, 새로운 공정을 적용한 CPU 등을 공개한 바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매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컨벤션 센터에서 전 세계 개발자 5000여 명이 모이는 전문 개발자 회의를 진행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행사에서 윈도 최신 버전과 새로운 컴퓨팅 기술을 선보인다.이런 행사는 1위 업체 입장에서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활용된다. 전 세계 기자들이 작성하는 기사, 블로그는 광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높은 홍보 효과를 발휘한다. 관련 업계에 트렌드를 주도하는 기업으로 각인되는 효과도 있다.최근 들어 IT 기업들은 제품보다 향후 트렌드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부문 간 다양한 융합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한 제품을 내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분석해 그 부문에 필요한 제품과 환경을 함께 구현하는 것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 낸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신제품보다 라이프스타일을 연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가령 HP는 전 세계 7개 지역에 있는 23개 연구소에서 600명이 소비자와 시장을 분석하고 있다. 5개의 테마와 20~30개의 프로젝트가 연구된다. 그 결과 기회가 있다고 판단되면 제품 디자인, 기획, 판매, 유통이 빠르게 진행된다. 막연히 ‘시장이 있을 것 같다’ 또는 ‘이런 제품이라면 시장에서 팔릴 것 같다’라는 짐작으로 제품을 만드는 대부분의 중소기업과 전혀 다른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프로세스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1위 기업들도 시장을 잘못 파악해 실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1위 기업들의 성공 확률은 매우 높다.1위 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2위 기업들을 비롯해 하위 기업들의 노력도 치열해지고 있다. 1위를 제외한 나머지 업체들은 바잉파워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차별화를 갖춰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1위 업체보다 낮은 가격에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플 아이팟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바잉파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출혈이 뒤따른다. 2005년 아이팟나노가 출시될 때 판매 가격은 2GB 용량이 23만 원이었지만 국내 MP3플레이어 업체들은 플래시메모리 구입에만 20만 원을 써야 했다. 1위를 제외한 다른 업체들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원가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이 때문에 하위 기업들은 틈새시장을 노리는 전략을 자주 사용한다. 1등 기업이 신경 쓰지 않는 작은 규모의 시장이나 지역, 대량생산이 불가능한 제품에 주력하면서 몸집을 키운 뒤 기회를 노리는 전법이다.이런 상황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IT 제조업체들에 해법을 제시해 준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나 LG전자처럼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오른 업체는 각 부문 1위 업체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중소 IT 제조사들은 차별화에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7년 전인 2001년 HP가 컴팩과 250억 달러 규모의 주식 교환을 통한 합병을 밝혔을 때만 해도 PC 시장은 델이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HP는 기존 프린팅 사업과 PC 사업을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은 HP와 컴팩의 기업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합병 성공에 의문을 나타냈다. 하지만 HP는 컴팩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곧 2006년부터 PC 부문 1위를 차지하는 결과로 나타났다.HP는 성능이 가장 좋은 PC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PC를 가장 많이 만드는 업체가 됐다. HP는 매분기마다 1000만 대 이상의 PC를 판매하고 있으며 델과의 격차를 갈수록 벌리고 있다. PC의 중요 부품인 CPU, 하드디스크드라이브, 메모리 등을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며 노트북 PC 어댑터 등 부품을 규격화해 재고를 통합 관리하는 방식 등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이형근·디지털타임스 기자 bruprin@gmail.com©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