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현대건설 매각에 왜 소극적인가

‘대우조선해양을 팔겠다.’지난 3월 26일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을 발표했다. 그동안 영업 부진과 낮은 주가 수준 때문에 매각을 미뤄 왔지만 2007년 이후 업황이 좋아지고 있어 팔기로 결정했다는 설명이었다. 조속히 매각 주간사를 선정하고 오는 8월 무렵에 우선협상대상자를 정하기로 하는 등의 매각 일정도 밝혔다.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매각을 발표하자 외환은행이 발끈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현대건설을 젖혀두고 대우조선해양부터 매각하는 것은 시장의 기대를 저버리는 행위라는 얘기다.외환은행이 이렇게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업계는 받아들인다. 외환은행은 산업은행 우리은행과 함께 현대건설 매각 운영위원회 회원이다. 외환은행은 2006년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을 졸업하면서 줄기차게 매각을 주장해 왔지만 산업은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근엔 3월 28일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현대건설 매각 주간사를 선정하겠다는 외환은행의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매각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 없다’고 뒤돌아섰다. 이런 마당에 대우조선해양을 팔겠다고 나섰으니 외환은행이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게 업계의 해석이다.현대건설과 대우조선해양을 같은 시기에 매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현대건설 매각 시점은 또다시 안개 속으로 숨어버린 셈이 됐다. 외환은행은 4월 중에 주주협의회를 소집해 매각 작업을 진행하겠다고 맞불을 놓은 상태지만 산업은행의 협조 없이 매각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관련 법규상 산업은행의 동의 없이 매각 주간사를 선정할 수는 있지만 우선협상대상자를 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도대체 산업은행은 왜 현대건설 매각에 소극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일까.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건설 매각 논란이 시작된 2006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현대건설이 워크아웃을 졸업하면 바로 매각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대우건설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흥행상’의 이유로 뜻을 굽혀야 했다.그렇지만 ‘시간’은 외환은행에 ‘약’이 되지 않았다. 2006년 8월에 산업은행이 예상치 못한 이유를 들어 매각을 진행할 수 없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은 당시 현대건설의 옛 사주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매각을 진행하면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라고 우려했다. 현대건설 부실의 책임이 있을 수 있는 현대그룹이 인수 후보자로 나설 경우 이를 허용해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논리였다.은행연합회의 채권금융기관 출자전환주식 관리 및 매각준칙은 ‘부실 책임이 있는 구(옛)사주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우선협상대상자에서 제외한 뒤 부실 책임의 정도 및 사재 출연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사후 평가를 통해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부실의 책임이 있는 데다 이렇다 할 자구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현대건설을 인수할 자격이 없다. 이렇게 보면 옛 사주(구사주)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산업은행의 입장에 반대하기는 어렵다.문제는 ‘옛 사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다. 산업은행은 2006년 8월 이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게 업계의 일관된 평가다. 외환은행 측이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산업은행이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대안도 내놓지 않은 채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특정 잠재 매수자와 관련된 소송(예금보험공사가 하이닉스반도체 부실 책임을 물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제소한 사건 등)의 결과를 기다리자는 ‘합리성이 결여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그렇다면 산업은행은 왜 스스로 제기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걸까.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란 게 업계의 분석이다. 현대건설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들은 현대그룹, 현대중공업 등 대개 범현대가에 속한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 정부와 범현대가는 그다지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가 막판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계를 청산한 것이 빌미가 됐다. 정권과 껄끄러운 관계인 현대가에 현대건설이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언제가 될지 모르던 현대건설 매각 분위기는 대통령 선거 직후 급반전됐다. 역시 정치적인 이유였다. 현대건설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상 정부와 현대가의 불편한 관계도 정리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으면서 현대건설 매각이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예상이 쏟아져 나왔다. 정몽준 의원이 대선 직전 이 대통령과 손을 잡은 마당인 데다 전광우 금융위원장도 산업은행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비금융 기업을 조속히 매각해야 한다고 밝혀 현대건설 매각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졌다.이에 따라 다급해진 것은 현대그룹이었다. 일찍부터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밝혀 왔지만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의 유상증자를 통해 현금을 확보했지만 7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현대건설 인수 자금을 확보하는 데엔 역부족이란 관측이 많은 데다 현대중공업과 KCC가 연대해 현대건설 인수전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가 파다하게 퍼지자 위기감이 고조됐다.사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는 현대건설 자체가 탐나서이기도 하지만 현대그룹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진단한다. 현대중공업과 KCC는 현대그룹의 주력 기업인 현대상선의 지분을 각각 25.4%, 5.98% 보유하고 있다. 또 현대건설은 8.3%의 현대상선 지분을 가지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KCC 연합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상선 지분이 39.68%로 현 최대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의 34.39%를 넘어선다. 단번에 현대상선의 최대주주가 되는 것이다.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과 경영권 분쟁을 겪은 일이 있는 만큼 이 시나리오는 업계에서 꽤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건설을 인수한 이후 현대건설은 KCC가,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이 가져가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어 ‘실익’ 차원에서도 현대중공업과 KCC의 연대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건설 인수에 누가 뛰어들든, 그 파급 효과가 어떻게 되든 현대건설의 매각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 대우조선해양 매각이 결정되면서 현대건설 매각은 또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이번 결정을 두고 업계 일각에선 다시 ‘정치적인 해석’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먼저 대우조선해양을 매각한다는 발표의 시점이다.업계에 최근, 4월 총선 이후에 국책은행장을 교체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흘러 다니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 입장에서는 총선 전에 새 정부의 방침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유리하다. 현대건설이든, 대우조선해양이든 매각 작업에 속도를 내야 하는데 둘 중 현대건설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가지 정치적 이슈가 함께 물려 있어 총선 전 매각 작업을 하는 데에 부담이 적지 않다는 이유다.반면 대우조선해양의 경우엔 산업은행(31.3%)과 한국자산관리공사(19.1%) 등 정부 측 지분이 압도적이어서 매각 절차도 단순할 것으로 예상된다. POSCO, 현대중공업 등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기업도 여럿이다. 산업은행 입장에서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은 정부의 방침에도 코드를 맞추면서 부담도 없는 ‘굿 딜’이 되는 셈이다.이러한 정치적인 해석을 산업은행이 달가워할 리 없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한 열쇠는 산업은행이 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현대건설 매각에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한다면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게 될 것”이라며 “어찌됐든 현재 상황대로라면 현대건설 매각은 한동안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