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왜 없겠는가. 그렇지만, 그토록 많은 이야깃거리와 추억들이 있을 텐데 아버지는 내게 있어 어떤 존재였던가를 정리해 보려니 회한과 불효만이 떠오를 뿐 글이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문득, 내 아들이나 딸들이 그들의 아버지인 나에 대해 글을 쓴다면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기묘한 두려움이 앞선다.아버지는 참으로 힘들게 당신의 역할을 하셨던 분이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힘 안들이고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 아버지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인데 나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에 7남매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공부시켜야만 했던 아버지는 더더욱 어렵게 자신의 역할을 하셨다는 생각에 가슴이 막혀 온다.광복되던 해 일가친척 하나 없는 남한 땅으로 넘어와 박봉의 공무원으로 아들 여섯에 딸 하나를 키워야 했던 아버지셨다. 학교에서 소풍을 가는데 도시락이 볼품없어 창피했을 때,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독촉 받았을 때, 하숙비가 밀려 주인아주머니로부터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등 내가 필요했을 때 그것을 제때에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아버지셨다.내게는 아래로 남동생이 다섯이 있었고 막내가 여동생이었는데 동생들 중에 누군가가 나가서 놀다가 친구들과 싸우고 얻어맞고 들어오거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으면 맏이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동생들이 저 모양이 아니냐고 역정을 내시며 나만 혼을 내셨다. 그렇게 자라서인지 지금도 동생들은 나를 무척 어려워하는 편인데 그때는 너무도 억울하고 분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몹시도 원망했고, 내 입장이나 체면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무서운 아버지, 친구들의 아버지들보다 무능한 아버지라는 생각도 가졌었다.나와 내 형제들은 그런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인지 어떻게 하든지 빨리 독립하여 번듯하게 살아야겠다는 일념을 더욱 굳게 다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도, 내 형제들도 차츰 어른이 되어 가면서 늘 가슴 깊은 곳에 새겨둔 아버지의 말씀이 있었다.아버지는 약주를 즐겨하신 편인데, 통금이 가까운 늦은 시간에 귀가하실 때면 잠자리에 든 자식들을 모두 깨우고는 일장연설을 하기를 좋아하셨다. “사람은 때에 맞춰 씨를 뿌릴 수 있어야 하고, 거둘 때도 어김없이 때를 맞춰야 한다.” “너희들은 지금 공부하는 때다. 이 아버지가 어떻게 하든 공부는 시킬 테니까, 그저 열심히 공부만 잘해라. 그리고 옛말에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라는 말이 있다. 한 가지만 잘하면 세상 사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저것 다 잘하려 하지 말고 그저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하도록 해라”라는 말씀을 꾸벅꾸벅 조시면서 되뇌셨다.자다 말고 눈 비비고 일어나 술 냄새를 맡으며 그 같은 얘기를 이틀이 멀다고 들어야 하는 나나 내 형제들에게는 그 같은 고역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심한 비유로 이렇게 말씀을 맺으셨다. “설사 네가 잘못 돼서 똥통을 지게 되는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그 계통에서는 너를 따를 자가 없는 최고가 되란 말이다. 알겠느냐?”왜 하필 똥통인가. ‘一勤天下無難事’라는 글귀는 똥통이라는 말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나와 내 형제들의 좌우명이 되었다.아버지께서 떠나신 지도 20여 년이 지났다. 어머니께서도 10여 년 전에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나와 내 형제들도 이미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어 각자의 길을 가고 있고 아버지 노릇을 잘해보려고 열심히 살고들 있다.그게 누구의 덕일까. 가난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물려준 재산이 없다. 하지만 나와 내 형제들은 아버지가 시키신 대로 직장에서, 업계에서 당당한 일등이 되기 위해 무진히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분은 나와 내 형제들뿐만 아니라 먼 훗날의 자손들에게까지도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바른길을 일러주셨다.“아버지, 우리가 어려서 아버지의 깊은 뜻을 미처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뒤늦게나마 시키시는 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당신의 손자 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영원히 사랑합니다.”글 / 김갑의 경북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1940년 함경남도 영흥군 출생.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2기)한 뒤 1960년대 국립영화제작소와 영화사 태창흥업 등에서 조감독, 기획실장 등을 거쳐 한미영상기획 대표를 지냈다. 현재 동국대 영상대학원 겸임교수, (사)한국영화인협회 정책위원장, 경북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