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CEO도 실수하면 ‘끝장’…단기 업적주의가 발목 잡은 격

수만 명의 직원에다 전 세계에 촘촘히 깔린 네트워크. 말 한마디면 뉴욕 금융시장은 물론 글로벌 금융시장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사람. 한 해 받는 급여도 수천만 달러에 달하고 회사 자가용 비행기로 웬만한 출장을 갔다 오는 사람.다름 아닌 월가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다. 이들의 권한은 상상을 초월한다. 글로벌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금융회사들을 말 한마디로 쥐고 흔든다. 아무리 미 금융회사들이 자율화됐다고는 하지만 인사권을 틀어쥔 CEO들은 예외다. 이들은 금융회사의 오너가 아니면서도 실제 오너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막강한 존재다.지난 11월 초를 전후해 이런 월가 CEO가 두 명이나 잇따라 물러났다. 세계 최대의 증권사라는 메릴린치의 스탠리 오닐 회장과 세계 최대 은행이라는 씨티그룹의 찰스 프린스 회장이 그들이다. 이들이 줄줄이 날아갔으니 글로벌 금융시장을 회오리로 몰고 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대출) 부실 파문이 과연 엄청나긴 엄청난 모양이다.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회사 모두 즉각 후임자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메릴린치는 오닐이 물러난 뒤 보름이 지난 14일이 되어서야 존 테인 뉴욕증권거래소 유로넥스트 CEO를 새로운 CEO로 선임했다. 93년의 메릴린치 역사상 첫 외부 출신 CEO다. 씨티그룹도 부지런히 후임자를 찾고 있으나 아직은 별무소득이다. 씨티그룹도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검증된 CEO’를 구하느라 발걸음이 분주하다.씨티그룹이나 메릴린치 같은 엄청난 회사가 후계자를 키우지 않았다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다. 그러다 보니 “후계자를 키우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닐과 프린스 회장의 경질 사유”라는 얘기도 나돈다.이처럼 이들 회사가 후임자를 찾는데 애를 태우는 이유는 단기 실적을 중시하는 월가의 문화와 천년만년 CEO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될 만한 싹은 미리 잘라버리는 현직 CEO들의 이기주의가 어우러진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첨단화돼 있다는 월가는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우선되는 약육강식의 현장이라는 얘기다.지난 10월 말 물러난 메릴린치의 오닐 전 회장이 작년에 받은 급여는 9138만 달러에 달했다. 고정 급여는 70만 달러에 불과했다. 현금 보너스 1850만 달러와 스톡옵션 등이 포함돼 총급여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월가 금융회사는 물론 미국 전체 기업을 통틀어 단연 ‘연봉 킹’이다.최초의 흑인 월가 CEO이기도 한 오닐 전 회장이 이처럼 천문학적인 급여를 받았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빼어난 실적 덕분이다. 메릴린치는 작년 75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다. 공은 자연스럽게 CEO인 오닐에게 돌아갔다. 그가 지난 2002년 취임하자마자 시작한 구조 조정도 찬사의 대상이 됐다.그러나 상황은 하루 아침에 바뀌었다. 천하의 오닐도 단 한 번의 실적 악화로 단칼에 날아갔다. 메릴린치의 3분기 손실은 22억4000만 달러. 93년의 회사 역사상 최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채권에 대한 투자 손실만 84억 달러에 달했다.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대상도 역시 오닐이 됐다. 그의 공격적 영업 전략이 엄청난 화를 불렀다는 비난도 쏟아졌다.이처럼 월가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실적’이다. 실적만 좋으면 ‘만사 OK’다. 반대로 실적이 나쁘면 금방 백척간두에 선다. 그래서 ‘실적 아니면 죽음(Perform-or-Die)’이라는 말도 생겨났다.이런 논리는 비단 CEO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경영진 모두에게 적용된다. 월가 금융회사들은 복합 금융체다. 투자은행 업무, 증권 업무, 은행 업무, 국제금융 업무에다 헤지 펀드와 사모 펀드까지. 금융 비슷한 업무는 하지 않는 게 없다. 그러다 보니 각 부분이 사업부제로 나뉘어져 있다. 능력 있는 직원들은 승승장구해 이들 사업부 책임자 자리를 꿰차게 된다.문제는 사업부의 실적에 대한 책임도 이들이 지게 된다는 점이다. 서브프라임 파문으로 월가 금융회사들이 대형 손실을 보자 가장 먼저 유탄을 맞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채권사업부 대표들이다. 씨티그룹을 비롯해 뱅크오브아메리카, UBS 등의 잘나가는 채권부문 대표나 국제투자부문 책임자가 줄줄이 날아갔다. 이전에 얼마를 벌어줬는지는 따지지 않고 당장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이들이 줄줄이 옷을 벗은 것은 이사회의 책임자 문책 요구도 거셌지만 CEO들이 자리보전을 위해 이들을 방패막이로 앞세웠던 영향도 있다. 누군가 희생양을 만들어 주주들의 불만이 집중되도록 해야만 자신들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어스턴의 제임스 케인 CEO는 자신의 확실한 후계자로 꼽혔던 워런 스펙터 사장을 서브프라임 관련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이러다 보니 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거친 풍파를 헤치고 2인자로 살아남기가 여의치 않다. 메릴린치나 씨티그룹이 후계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는 한 이유다.실적에 따라 울고 웃는다는 것은 실적만 좋으면 CEO 자리를 천년만년 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더욱이 주주들이 볼 때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조그만 실수에도 불구하고 현 CEO를 유임하는 게 낫다. 그러다 보니 CEO들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후계자를 잘 키우지 않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현재 JP모건 체이스 CEO인 제임스 디어몬은 씨티그룹 전 회장이었던 샌디 웨일의 수제자이자 공공연한 후계자였다. 젊었을 때 웨일과 인연을 맺은 디어몬은 웨일과 생사를 같이하며 웨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웨일 자신도 사석에서 디어몬을 가리키며 자신의 후계자라고 자랑할 정도였다.그러나 웬걸. 트래블러스보험과 살로먼 스미스바니 증권사를 갖고 있던 샌디 웨일이 씨티은행의 씨티코프와 지난 1998년 합병하면서 디어몬의 운명은 달라졌다. 씨티코프 출신의 존 리드와 공동 회장 겸 CEO 자리를 차지한 웨일은 단독 회장 겸 CEO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합병 직후 두 회사 경영진 간 다툼이 일어 웨일이 난처한 지경에 처했다.그러자 웨일은 자신의 수제자인 디어몬 당시 살로먼스미스바니 CEO를 해고했다. 비록 디어몬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해서 자른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출세를 위해 후계자마저 내쳐 버렸다는 점에서 월가의 냉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비단 웨일만이 아니다. 웨일에 이어 회장 자리에 오른 프린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했다. 프린스가 재임하던 시절 마이클 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비롯한 후계자 반열에 올랐던 10여 명의 고위직이 회사를 떠났다. 실적에 대한 책임도 졌지만 이들의 부상을 보이지 않게 견제한 프린스 회장의 태도도 이들을 몰아낸 한 이유로 지적된다.메릴린치의 오닐 CEO 체제에서 제롬 케니 부회장 등 핵심 인사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줄줄이 회사 문을 나선 것도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오닐 전 회장은 특히 비상사태에 대비해 후계자를 키우도록 한 회사 계획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프린스나 오닐로서는 탄탄한 실적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CEO 자리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후계자를 키우기보다는 견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월가에서는 얘기하고 있다.이렇듯 단기 업적 주의에 현직 CEO들의 이기심이 어우러져 있다 보니 월가 금융회사엔 마땅한 CEO감이 드물어졌다. 골드만삭스 출신인 로이 스미스 뉴욕대 교수는 “월가 경영자들이 주가에 집착한 나머지 부진한 분기 실적을 낸 사업부를 이끌던 사람들을 성급하게 해고하고 있다”면서 “경영자들이 이를 통해 이사회에 부하 직원들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능력 있는 인재를 내쫓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UBS의 금융 산업 담당 애널리스트 글렌 쇼는 “씨티그룹과 메릴린치 같은 유명한 다국적 기업들이 내부에서 CEO를 키우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현상”이라며 “이는 문화와 지도력 또는 지도력 결핍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겉으로는 마냥 화려한 월가 CEO. 하지만 그들도 실적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마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실적 책임을 물어 유능한 인재를 결과적으로 축출하는 경향도 짙어지고 있다. 모든 것을 성과로 말하는 월가의 문화가 역설적으로 월가의 CEO감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