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림화된 이탈리아식 경영 접목…‘중국 등 해외 진출에도 적극 나설 터’

‘물안개 피어오르는 저녁 무렵 양수리, 낙조를 머금어 비늘처럼 빛나는 서해안 갯벌, 강원도 인제의 시골집, 이불처럼 포근한 눈으로 덮인 뒷동산 풍경….’이방희(62) 삼익가구 사장은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메고 훌쩍 떠난다. 흑백으로 담아내는 그의 아날로그 사진은 풍경사진의 멋을 한껏 보여준다. 여백의 미가 녹아있는 흑백사진은 컬러사진에 비해 훨씬 품격 있고 깊은 맛을 낸다. 작년에는 관훈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한국사진학회 회장을 역임한 홍순태 씨는 그의 작품을 ‘은유’라고 표현했다. 한 컷 한 컷에 온갖 정성이 들어간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메모리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와는 다르기 때문이다.가구 제작에 임하는 태도 역시 비슷하다. 그에게 가구는 제품이면서 동시에 작품이다. 한 가지를 만들어도 혼신의 노력을 쏟는다.삼익가구는 고품격 클래식 가구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때로는 모던한 디자인이 풍미하고 때로는 번들거리는 하이글로시 가구가 유행하기도 하지만 삼익가구는 지난 30년 동안 클래식 가구의 외길을 걸어왔다. 흑백사진처럼 때로는 철지난 작품 같은데도 이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기품이 서려 있고 이를 찾는 고객층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혼 때 장만한 삼익가구를 40대에 접어든 중년 부인이 애프터서비스를 해달라고 요청해 오는 경우도 있고 딸의 혼숫감으로 다시 찾는 경우도 있다”고 이 사장은 설명한다.생산하는 제품은 침실 가구, 거실 가구, 소파, 주방 가구, 주니어용 가구 등이다. 디자인은 중후하다. 때로는 크랙 기법으로 앤티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색상은 원목 색깔을 최대한 살렸거나 짙은 고동색이 주류를 이룬다.그는 삼익가구 창업자는 아니다. 삼익가구 브랜드는 지난 1977년 탄생했다. 그가 이 브랜드를 인수해 가구 업체 (주)삼익TDF를 창업한 것은 지난 2000년이다. 불과 7년 정도 가구 업체를 직접 경영해 왔지만 성공적으로 대리점을 확장하고 매출을 늘리면서 지금은 여러 가구업체들이 이 회사의 경영 기법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그가 삼익가구를 맡을 당시 대리점은 40개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은 160개로 늘어났다. 이는 목재 자재 및 가구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일해 온 노하우와 제품에 대한 열정, 그리고 효율적인 조직 운영에서 비롯된다.이 사장은 공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1980년대 초 거성그룹으로 이직했다. 당시 거성그룹은 원목 수입 회사인 거성산업, 가구재인 MDF(중밀도섬유판)와 PB(파티클보드) 생산업체인 동인보드(현 한솔홈데코), 그리고 삼익가구를 자회사로 두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삼익가구에서 영업본부장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거성산업과 동인보드의 최고경영자를 역임했다.타사에 재직하는 동안 삼익가구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당시 대리점 대표 여러 명이 찾아와 당신이 회사를 살릴 적임자니 맡아서 경영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해 왔다”고 설명한다.그들의 간절한 요구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덩치가 큰 회사 전체를 맡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삼익가구’브랜드만 인수했다. 이후 회사 조직을 대폭 축소했다. 본사에는 디자인과 품질 관리 부문만 두고 생산은 아웃소싱했다. 협력 생산업체는 국내 25개, 해외 5개 등 총 30개를 뒀다. 이들 가운데는 이탈리아 중국 베트남 업체도 들어 있다.대신 디자인과 품질 관리에 전력투구했다. 고품격 제품을 생산을 위해선 이들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다. 제품이 좋으면 판매는 저절로 된다고 생각했다. 디자인도 상당 부분 아웃소싱했다. 본사에는 4명의 디자이너만 두고 외부의 디자인 전문가 20여 명과 계약했다.생산 제품의 품질은 철저히 점검했다. 협력 업체 사장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반드시 지켜줄 것을 요청했다. 아울러 다품종 소량 제품 생산을 요구했다. 대신 협력 업체에는 철저하게 현금으로 납품 대금을 결제했다.이런 방식은 생산과 디자인의 상당 부분을 아웃소싱으로 해결하는 이탈리아 가구 업체들의 경영 기법과 흡사하다. 이탈리아 업체들은 이런 경영으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삼익가구는 한때 전국의 대리점이 220여 개에 달했었다. 그것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대부분 떨어져나가 40개로 줄었으나 재건에 나선 것이다. 대리점들은 팔릴만한 제품이 많아야 해당 업체의 제품을 판매한다. 그런데 삼익가구는 다품종 소량 제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본사 직원이 26명에 불과한 미니 기업이지만 작년 매출은 약 200억 원에 달했다”고 이 사장은 설명한다. 조직 슬림화로 판매 관리비를 줄이고 순발력 있는 제품 생산과 다양한 제품 구색으로 소비자로부터 사랑받는 제품을 만든다는 게 그의 경영 전략이다.그는 “앞으로 대리점을 220개 수준으로 늘려나갈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이 중 180개는 삼익가구 대리점으로, 나머지 40개는 고급 브랜드인 ‘삼익갤러리’ 제품의 대리점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중국 시장 개척에도 나서기로 하고 칭다오 상하이 등지의 협력 공장도 물색하고 있다.신속한 배송을 위해 전국에 3개의 물류센터도 설립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우선 경기도 화성에 대지 6600㎡, 건평 5300㎡ 규모의 물류센터를 짓고 있다. 이 센터가 완공되면 영남과 호남에도 각각 1개씩의 물류센터를 건립할 예정이다.현재 본사가 있는 인천광역시 가좌동 인근에 본사 및 쇼룸을 겸한 새 건물을 마련해 리노베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 초 이 건물로 본사를 이전할 예정이다.그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디자인과 품질 향상, 물류 개선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고품격 주거 문화를 창조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더욱 새로운 변화, 더 나은 서비스, 고객 만족’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국 대리점과 함께 ‘NSC 운동’도 벌이고 있다. NSC는 ‘새로운 변화(New Revolution), 좀 더 나은 서비스(Service Plus), 고객 만족(Customer Satisfaction)’의 영어 머리글자다.이 사장의 경영 철학은 ‘정(情)의 경영’이다. 직원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함께 밤을 새우기도 한다. 때때로 와인 파티를 통해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직원들을 제 동생이나 아들 딸 같이 생각하고 대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지난 1990년대 초반까지 선발 가구 업체들은 수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공장,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많은 직원들 두면서 대형화 경쟁에 매달려 왔다. 부품에서 완제품 생산까지 모든 것을 한 울타리안에서 해결했고 판매와 수출도 도맡아 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투자가 이어져야 했고 이게 결국 가구 업체들을 경영난으로 몰아넣은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금융 비용과 재고 부담에 불황이 겹치자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삼익가구가 작으면서도 순발력 있는 새로운 가구 업체 모델로 탄탄하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회사 개요> 본사: 인천광역시 가좌동 대리점: 약 160개작년 매출: 약 200억 원취급제품: 침실 가구, 거실용 가구, 소파, 주방 가구 등약력: 1945년 충남 홍성 출생. 63년 홍성고 졸업. 64년 중앙대 수학과 입학. 71년 서울시청 근무. 83년 거성그룹 입사. 86년 삼익가구 영업본부장. 91년 동인보드(현 한솔홈데코) 대표이사. 95년 거성산업 법정관리인. 2000년 삼익TDF 대표이사(현). 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