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 부실이 더 문제…배럴당 100달러 넘어서면 심리적 공황 배제 못해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 중이다. 배럴당 90달러를 넘나들더니 어느새 ‘배럴당 100달러 시대’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배럴당 20~30달러였던 유가가 5배 가까이 올랐으니 ‘제3차 오일쇼크’란 말이 나올 법하다.그런데도 아직은 말뿐이다. 어디에도 ‘쇼크’는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증시가 그렇다. 뉴욕증시를 비롯한 글로벌 증시는 유가급등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견조하다. ‘유가가 오르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면 기준금리를 올려 결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게 교과서에 나오는 설명이다. 이 설명이 맞다면 경제도 타격을 받고 증시도 영향을 받아야 마땅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시가 견조한 것은 상황이 1,2차 오일쇼크 때와는 달라진 데 따른 것이다. ‘유가상승에 따른 경제악영향’ 우려는 심리적 우려일 뿐 실제 경제환경은 현재의 고유가를 능히 감당할 정도로 성숙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물론 그렇다고 고유가의 폐해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설 경우 스펀지처럼 경제 및 증시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유가 100달러시대’를 코앞에 둔 지금, 증시가 견조하다는 것은 고유가란 악재가 과거와 같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고유가란 투자전략의 변수를 ‘영점조정’해야 할 이유다. 상상할 수 있는 악재가 한꺼번에 돌출된 탓이다. 우선은 수급여건이다. 겨울철을 맞아 난방유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다. 중국 인도 등 개발도상국의 고도성장으로 이들 국가는 석유를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변했다. 수요는 늘고 있지만 공급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감소세다.멕시코는 멕시코만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원유생산의 5분의 1을 줄였다가 다시 정상회복하는 등 수급에 차질을 빚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증산에 대해 팔짱을 끼고 있다. 여기에 수급환경도 좋지 않았다. 터키는 이라크 국경지대의 쿠르드족을 겨냥해 군사작전을 벌였다. 미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안을 발표했다. 지구촌 유전지대인 중동이 불안에 휩싸이면서 공급이 줄어들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그렇지만 이런 수급불균형은 과거 1,2차 오일쇼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산유국들이 의도적으로 생산을 줄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가가 몇 년 사이에 5배 가까이 뛰어 오른 것은 1,2차 오일쇼크 때와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다름 아닌 달러화 약세와 투기자본의 가세다. 달러화는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하락해왔다. 경상적자를 해결하려는 미국 측의 ‘용인’과 미국경기의 둔화조짐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다. 그러다보니 유로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는 연일 사상 최저치를 경신 중이다.달러화 가치 하락은 달러화 자산의 기피현상을 낳게 마련이다. 달러화로 갖고 있으면 손해이기 때문이다. 달러화에 들어있던 자금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원유 등의 상품으로 몰려들고 있다. 뿐만 아니다. 현재 국제시장에서 모든 원유는 달러화로 거래된다. 유가가 똑같더라도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면 산유국 입장에서 실질소득은 줄어들게 된다. 이를 상쇄하려면 감산을 최대한 억제해 유가를 끌어올리는 수밖에 없다. OPEC가 증산에 미적거리는 이유다.엄청난 투기자금이 원유시장에 들어왔다는 점도 과거완 다른 점이다. 세계적인 저금리를 바탕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글로벌 유동성은 증시와 부동산 상품시장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그러나 과잉투자로 인해 거품붕괴조짐이 일자 증시와 부동산에선 투기자금이 빠져 나오는 추세다. 이들은 물가변동 등에 대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원유시장으로 몰리면서 투기적 가수요를 유발하고 있다. 어디를 둘러봐도 유가가 오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고유가가 당장 영향을 미치는 건 물가다. 유가상승으로 원가가 올라간 기업들은 상품가격을 올려 이를 상쇄하려 한다. 물가가 오르면 소비가 준다. 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금리가 오르면 기업투자는 줄어들고 경기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특히 물건을 만드는 데 기름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러다보니 물가에 대한 유가의 영향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 크다. 지구촌이 고유가에 벌벌 떠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그런데도 요즘 미국 물가는 물론, 글로벌 물가는 상당히 안정돼 있다. 중국의 물가상승률이 높아졌지만 고유가 탓이라고 보긴 힘들다. 고속성장에 따른 부산물이다. 이처럼 물가가 안정된 것은 역시 ‘월마트 효과’ 때문이다. ‘월마트 효과’란 값싼 제품이 시중에 넘쳐나는 현상을 말한다. 중국 등이 값싼 제품을 글로벌 시장에 공급하다보니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의 ‘체감물가’는 괜찮은 편이다. 이는 소비 유지로 이어져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다. 실제 베네수엘라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점유율 경쟁을 벌였던 지난 1998년 국제 유가는 배럴당 11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지금은 8배나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세계 경제는 연평균 5% 이상 성장했다. 월마트 효과가 한몫 단단히 한 덕분이다.물론 값싼 물건의 생산공장인 중국의 물가가 들먹이면서 이 월마트 효과도 사라지는 조짐이 눈에 띈다.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인플레이션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인건비가 오르는 중국은 제품값 인상으로 이를 전가하려 한다. 세계 시장을 꽉 틀어쥐고 있는 중국상품값이 오르면 세계 물가가 동반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물건은 여전히 싸다. 베트남 등 중국을 대체할 만한 공장도 줄을 잇고 있다. 당분간은 월마트 효과가 이어져 고유가의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근거다.미국의 경우 고유가와는 달리 소매 휘발유값이 안정돼 있다는 점도 증시를 견조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다. 자동차가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다보니 가장 피부적으로 느끼는 게 휘발유값이다. 휘발유값이 오르면 이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쇼핑도 잘 가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허리띠를 졸라 맨다. 당연히 소비도 둔화된다. 소비가 미국경제 성장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 소비가 줄면 만사 끝이다.다행히 지금까지는 휘발유값이 안정세다. 동부지역의 경우 아직 갤런당 3달러를 밑돈다. 휘발유값 3달러는 심리적 마지노선. 3달러를 경계로 소비행태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휘발유값이 3달러를 넘지 않고 있으니 소비자들은 고유가를 체감하지 못한다. 이는 고스란히 증시에 반영된다. 경제성장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아직 고유가의 영향권 밖에 있으니 증시가 고유가의 한파를 느낄 겨를이 없다.이머징 국가의 눈부신 부상과 산유국들의 달라진 투지행태도 증시안정에 기여하고 있는 요인이다.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 등 이머징 국가는 무한한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글로벌 국가들은 이들 국가로 시장을 넓혀 고유가를 극복하고 있다. 산유국들이 과거와 달리 오일머니를 글로벌 경제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산유국의 ‘국부펀드’는 세계 경제의 자금줄 역할을 하면서 글로벌 경제의 순항을 돕고 있다. 고유가의 ‘수혜’가 산유국을 거쳐 글로벌 경제로 퍼지고 있어 고유가 부담도 상당부분 덜어지고 있는 셈이다.뉴욕증시만 놓고 본다면 고유가보다 영향력이 더 큰 변수들이 많다는 점도 역설적으로 증시안정을 이끌고 있다. 현재 미국 경제의 화두는 여전히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파문과 경기 침체여부다. 당장 경기가 침체에 빠지느냐, 아니냐가 관건인 만큼 시간을 갖고 영향을 미치는 고유가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FRB가 기준금리를 내릴지 여부에 따라 증시가 휘둘리고 있는 게 단적인 예다. 여기에 기업실적이 주된 변수로 부상하다보니 고유가에 대한 걱정은 일단 덜고 있다. 유가에 관계없이 증시가 견조하다고 보는 건 곤란하다. 임계점을 지나면 기업이나 소비자 모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물가라도 들먹일라치면 증시의 관심은 유가로 쏠리게 돼 있다. 그 1차 임계점이 배럴당 100달러 시대다.물론 100달러 시대가 돼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그러나 심리적 공황상태가 엄청나다. 유가가 더 오를 것이란 심리까지 가세하면 그 파장은 더욱 커질 건 명약관화하다.이런 의미가 있는 만큼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서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상당하다. 우선은 심리적 저항감이 강하다. 단기간에 급등했다는 부담감은 투기세력의 움직임에 제한을 가할 것이 분명하다. 차익실현매물도 쏟아져 나올 수 있다. 그러다보니 유가 100달러를 훌쩍 뛰어 넘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거래정보 서비스업체인 INO닷컴의 애덤 휴이슨 사장은 “유가가 배럴당 95달러를 향하면 차익 실현이 이뤄질 것”이라면서 “내년 1, 2월까지는 유가가 100달러를 넘지 못할 것”으로 예측했다이런 예측이 맞아 떨어져 증시의 견조함이 유지될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할듯하다.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