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일, 한·미 양측 대표가 마주 앉은 협상 테이블에는 팽팽한 긴장만이 감돌았다. 협상 최종 시한을 불과 몇 시간 앞 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카란 바티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 어느 쪽도 쉽게 양보하지 않았다. 피 말리는 지루한 버티기가 계속됐다.마침내 바티아 부대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쌀 개방 요구를 철회하겠다.” 두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424일 동안 이어지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협정문의 문구 한 줄 한 줄은 즉각 경제적 가치로 환산돼 나왔다.한·미 FTA 협상은 오늘날 협상력이 왜 그토록 강조되는지 잘 설명해 준다. 협상 테이블에서의 밀고 당기기에 따라 두 나라의 이해득실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협상은 몇 년 동안 벌어야 할 막대한 이윤을 단번에 가져다주지만, 실패한 협상은 기업을 망하게 하기도 한다. 협상력이 곧 돈과 직결되는 시대인 셈이다.KTF는 3년간의 끈질긴 협상 끝에 NTT도코모와의 전략적 제휴를 이끌어냈다. NTT도코모는 당초 아시아에는 자본 투자를 하지 않겠다던 입장을 바꿔 KTF의 지분 10%를 20% 이상의 프리미엄을 붙여 인수하기로 했다. KTF는 이 제휴로 향후 7년간 1조 원가량의 부가가치 창출이 예상되는 3세대 이동통신 광대역부호분할다중접속(WCDMA) 분야에서 확실한 성장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NTT도코모 협상팀의 독특한 협상 습관을 파악해 공략한 게 성공의 숨은 비결이다.물론 뼈아픈 실패 사례도 있다. 1999년부터 진행된 대우자동차 매각 과정은 협상력 부재가 빚은 대표적인 ‘재앙’으로 꼽힌다. 포드가 70억 달러를 제시했던 대우차의 몸값은 내부 갈등, 잦은 협상 대표 교체 등으로 매각이 지연되면서 급락, 결국 2002년 4억 달러라는 ‘헐값’에 GM에 팔렸다. 뚜렷한 대안이 없던 우리 협상팀은 시종 외국 자동차 업체에 협상 주도권을 내주고 끌려 다녔다.협상은 쉽게 돈을 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는 간단한 계산으로 쉽게 확인된다. 매년 1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1000억 원어치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적어도 600억 원가량의 원부자재를 구매해야 한다. 이 기업은 매년 1600억 원어치를 사고파는 협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협상을 잘하면 10% 정도 더 버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기업의 경우 10%면 160억 원에 해당한다. 이를 원가 절감으로 벌려면 전 직원이 1년 내내 엄청난 노력을 들여 쥐어짜야 한다. 하지만 협상만 잘하면 ‘세치 혀’로 가만히 앉아서 이 돈을 챙길 수 있다.협상스쿨은 협상에서 이길 수 있는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곳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요즘도 미국에서는 매년 수십만 명이 협상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협상스쿨에 등록한다. 협상스쿨의 등장은 협상이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사고의 전환에서 비롯된 것이다.과거 오랫동안 협상은 일종의 예술로 취급됐다. 협상의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운다고 늘어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해 하버드 로스쿨과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학자들을 중심으로 협상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들은 협상이 과학이며,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걸 밝혀냈다. 이는 최신 심리학의 연구 성과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법칙이라고는 하지만 일반 자연과학의 법칙과는 차이가 있다. 인간을 마음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예측 불허의 요소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가능성을 현저하게 높이는 특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IGM) 협상스쿨 원장은 이를 ‘협상의 10계명’으로 정리해 냈다. 핵심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전 원장은 “테크닉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테크닉은 실제 협상 테이블에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섣부른 테크닉은 협상을 망친다.전 원장이 강조하는 협상의 기본은 ‘내가 요구하는 것이 당신에게 이런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 요구를 들어주는 게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다’라는 점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유능한 협상가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보다 상대방이 얻을 혜택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기업가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자기 이야기에만 몰두한다. 협상을 망치는 지름길이다.국내에서도 협상교육의 효과가 확인되면서 기업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2005년 문을 연 IGM 협상스쿨은 지금까지 3000여 명의 기업인이 거쳐 갔다. 초기에는 최고경영자(CEO)들이 중심이었는데 최근에는 임원, 관리자급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장승규 기자 skjang@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