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브레이브 원'

갓 뽑아낸 카페라테 한 잔을 손에 들고 또각또각 하이힐 리듬에 맞춰 거리를 걷는다. 일과 사랑, 그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유쾌하고 달콤하다. ‘섹스 앤드 시티’에서부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까지, 과거 로맨틱 코미디가 차지했던 대중적 사랑을 이어받아 극장가와 출판가를 활보 중인 ‘치크리트(chic-lit: chic와 literature의 합성어로 젊은 여성 취향의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핵심은 도시의 판타지다. 남성에 뒤지지 않는 능력과 자본을 양손에 쥔 여성들은 도시적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이 안기는 일상의 쾌감을 한껏 만끽한다.그러나 치크리트의 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 어느 날 문밖을 나선 그녀가 권총 강도와 마주친다면. 아름답고 친절했던 바로 그 도시가 매일 밤 누군가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대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너무나 단호한 사실 앞에서 허약한 판타지의 휘장은 금세 찢겨나갈 것이다.‘브레이브 원’의 시작은 달콤한 로맨스다. 라디오 진행자인 에리카(조디 포스터 분)는 약혼자 데이빗(나빈 앤드루스 분)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청첩장을 고르며 단꿈에 젖어있던 커플은 그러나 공원 산책을 나갔다가 한 무리의 불량배들에게 처참하게 폭행당한다. 몇 주 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에리카는 데이빗이 숨졌음을 알고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힌다.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구입한 그녀는 어느새 밤거리를 누비며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건의 뒤를 쫓던 강력반 형사 머서(테렌스 하워드 분)는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 앞에서 좌절하고 에리카의 상처를 지켜보면서 용의자인 그녀와 묘한 유대를 형성한다.연인을 잃고 복수에 나선 여자. ‘브레이브 원’의 플롯은 일견 ‘법 대신 내가 심판한다’는 유형의 익숙한 패턴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는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라기보다는 현대 도시인들의 일상에 잠복한 불안과 공포에 대한 냉혹한 보고서에 가깝다.녹음기를 들고 뉴욕 구석구석의 소리를 수집할 정도로 도시를 사랑하던 에리카는 치명적인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낯선 행인의 숨결에 소스라치고, 모퉁이에 비치는 그림자에 숨을 죽여야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가장 잔혹한 것은 그녀를 파멸시킨 것이 대단한 동기나 목적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 곳곳을 배회하고 있을 무의미한 악의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하찮은 시비로 인해 한 개인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뽑힐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하는 도시라는 것을 ‘브레이브 원’은 음산하게 속삭인다. 그 목소리의 두려움과 떨림은 온전히 조디 포스터의 몫이다.▲박치기!-LOVE&PEACE박치기로 일본 학생들을 제압했던 조선학교 학생 리안성(이사카 순야 분)은 졸업 후 죽은 아내가 남겨 놓은 아들 창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목숨처럼 사랑하던 아들이 병마에 사로잡히자, 안성은 그의 치료를 위해 도쿄로 올라온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의 조선인을 향한 차별과 냉대로 인해 끊임없이 아픔을 겪게 된다. 지난해 국내에도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치기!’의 후속편. 전작과 마찬가지로 재일 한국인 제작자 이봉우와 이즈츠 가즈유키 감독이 손을 잡고 완성한 작품이다.▲카핑 베토벤베토벤의 말년을 조명한 작품. 자신의 마지막 교향곡인 ‘9번 교향곡’ 초연을 앞두고 베토벤(에드 해리스 분)은 음대생 안나 홀츠(다이앤 크루거 분)를 악보 카피 담당자로 추천 받는다. 여성이란 이유로 안나와의 만남이 달갑지 않았지만 첫날 자신이 잘못 표기한 음을 간파하고 고쳐 그려놓은 것을 보고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유로파 유로파’ ‘비밀의 화원’ ‘토탈 이클립스’를 연출했던 거장 여성 감독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신작이다.▲비커밍 제인남자나 결혼보다 글쓰기에 푹 빠져 있는 제인 오스틴은 늘 부모님의 잔소리에 시달리는 처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앞에 오만함으로 무장한 남자 톰 리프로이(제임스 맥어보이 분)가 나타나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하지만 제인의 마음은 어느새 그를 향하고, 창작의 영감도 더해져 집필도 열정적으로 하게 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앤 해서웨이가 제인 오스틴을 연기했다.최하나·씨네21 기자 raintree@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