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는 친지들과 함께 조그만 잔치를 열었다. 나의 행정고시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친지들은 물론 당신께서도 너무 기뻐하셨다.“노래 한 곡 하시죠?”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노래를 청했다.“내가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한 곡 해야지.” 아버지는 노래를 시작했다.나는 아버지가 노래하는 모습을 그날 처음 봤다. 그리고 그때 아버지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지도 처음 알았다. 늘 근엄하고 어렵기만 했던 당신께선 그렇게 나의 행정고시 합격을 축하해 주셨다.2000년 여름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게 공무원을 그만두고 컨설팅회사로 직장을 옮기겠다고 말했다.“뭐하는 곳이냐?”, “네 처는 무어라 하더냐?”, “네가 생각을 많이 하고 한 결정한 일일 테니 알아서 하거라.”아버지는 컨설팅이 무엇인지 잘 모르신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내 아내의 반대가 없다면 나를 믿겠다고 하셨다. 그저 네 뜻대로 하라고만 하셨다.다음날 서울로 올라왔다. 잘 도착했다는 문안 전화를 드리자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다.“아버지께서는요?” “약주를 드시고 누워 계신다.” 아버지는 건강 때문에 꽤 오래전부터 한동안 약주를 끊고 있었다.2004년 겨울 어느 날. 미국의 골프 전문대학에서 16개월간 공부를 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네 나이가 지금 몇이냐? 절대 안 된다.”아버지는 내가 코흘리개 어린애였을 때부터 하고자 하는 일을 말려본 적이 없으셨다. 대신 모든 결과는 내가 책임지라고만 하셨다. 그런 아버지는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다 큰 아들에게 처음으로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하지만 나는 당신의 말씀을 거슬러야만 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꿈을 찾아 떠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흰머리가 무성해진 아버지가 나 때문에 한없이 걱정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미국 애리조나에 있는 골프 대학에 다니면서 은퇴를 하시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가끔씩 문안 전화를 드렸다.“밥은 잘 먹고 있냐?” “어디 아픈 데는 없냐?” 아버지는 항상 내 안부만 물으셨다. 가끔씩은 떨리는 목소리셨다. 다시 한 번 밀려오는 죄송한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16개월이 지난 후 학교를 졸업했다. 그렇게 원하던 티칭 프로의 꿈을 이뤘다. 귀국길에 올라서야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하지만 다시 인사드린 아버지는 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뭘 해서 어떻게 먹고 살 생각이냐”는 아버지의 질문 속에는 아직도 철이 없는 아들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가득했다.“그 좋은 머리로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지, 골프나 치고…”귀국한 지 1년6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내 주변에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가슴속에 품었던 꿈들을 이루기 위해 작은 일부터 하나하나 해 나가고 있다. 지난 9월에는 16개월간의 미국 골프 유학 생활 동안 써 두었던 일기를 책으로 엮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보내드렸다.그리고 추석이 되어 1년 만에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 귀국 후 처음으로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 비록 예전 같은 환한 미소는 아니었지만, 아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보여준 것이라 믿고 싶다.나는 골프를 배우면서 인생을 배웠다고 생각한다.내가 치는 한 샷 한 샷이 단지 나의 꿈뿐만이 아니라, 지난 30여 년간 아버지가 나에게 줬던 끊임없는 믿음도 함께 실려 있음을 깨닫게 돼서다. 애리조나의 사막을 향해 날리던 한 샷이 너무나 소중했던 이유다. “아버지, 사랑합니다.”글 / 박경호1970년생.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행정고시 합격 후 농림부 사무관을 지냈고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컨설턴트를 거쳤다. 현재 36세의 나이에 SDGA 애리조나 스쿨에 입학해 골프 레슨 프로의 길을 걷고 있다. 신한은행 VIP 고객 골프 컨설턴트, ‘골프&라이프’ 대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