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출신 용접공→파업 주도→사업실패→영재교육가로 재기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지난 1976년. 서울대 공대에 다니며 야학을 하던 임국진 씨는 야학생들에 이끌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날 액자에 걸린 전태일 씨의 마지막 일기를 본 뒤 그는 ‘심장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순박한 대학생이었던 임 씨의 인생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다.(주)창의와탐구 임국진 사장(50)은 부드러운 눈빛을 지녔다. 얼굴 표정도 온화하다. 충청도 사투리가 섞인 억양은 느린 베이스 톤이다. 그런 그가 1980년대 맹렬한 노동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뜻밖이다.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를 나온 뒤 노동운동과 민주화 투쟁, 위장 취업, 감옥행을 거쳐 학원 강사와 교육 사업을 시작한 이후 두 번의 절망적인 사업 실패와 오랜 반지하 셋방 생활로 점철된 삶에서 재기해 성공을 일궈가고 있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창의와탐구는 전국에 10개의 ‘와이즈만 영재교육’ 직영 센터와 90개의 프랜차이즈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진단 평가를 통해 선발된 5만3000 여명의 우수한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과학과 수학 분야 ‘창의력 기반 영재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학교와 기업체, 청소년 단체 등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과학체험전’ 및 캠프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등 과학 수학 사교육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고 있는 벤처 교육 기업이다.본사 직원이 약 250여 명, 전국 센터 교사와 운영진이 약 1400여 명에 이르는 작지 않은 규모의 기업을 키워낸 임 사장은 어떻게 노동운동가에서 교육 전문가로 변신했을까.임 사장은 1975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뒤 서클활동과 야학을 하며 사회 현실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3학년을 마치고 강제 징집돼 군대를 다녀왔고, 졸업 후 쌍용양회에서 2년간 대졸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서울 영등포 일대 작은 공장을 다니며 용접과 선반 기술을 배운 후 인천에 있는 1000명 규모의 이천전기에 위장 취업해 노조민주화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 후 1987년 6월 항쟁까지 오랫동안 수배와 지하 생활, 구류와 구속의 연속이었던 이른바 ‘직업적 혁명가’로 살았다. 민주화와 함께 세상 속으로 나와 민중당 활동을 했다. 34세 되던 1989년 오랫동안 함께 활동하며 사귀었던 아내와 결혼해 서울 행당동 보증금 100만 원, 월세 10만 원짜리 판잣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가장이 되고 나니 친구들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릴 수 없게 됐다. 사무실 소파에서 계속 잠을 잘 수 없어 2년 후 운동에 다시 복귀할 요량으로 돈벌이에 나섰다. 민중당 활동을 하던 이재오(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선배의 소개로 서울역 앞 경일학원에 수학 강사로 취업했다.하지만, 재수생을 대상으로 입시 수학을 강의하는 일은 그에게 ‘가치 있는 삶’의 보람을 줄 수 없었다. 2년여 힘든 갈등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찾기에 골몰하다가 마침내 궁즉통(窮卽通)해 과학 실험 교육을 생각해낸다. 1년 준비 끝에 1993년 말 마침내 서울 대치동에 실험실 3개로 ‘어린이 과학교실’을 창업했다. 국내 최초의 과학 실험 교실이었다.3년 동안 부인과 함께 ‘어린이 과학교실’을 900명 규모의 유명한 학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후 1996년부터는 전국적인 사업화를 위해 본격 뛰어든다. 마침 김영삼 정부가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 ‘방과후 교육’ 활성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임 사장은 이것이 과학 교육 활성화에 매우 적합한 제도인 동시에 사업적으로도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다 던져 학교 특기 적성 사업에 나섰다.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실패하고 만다. 학교의 수많은 규제와 낮은 부가가치, 방학으로 인한 사업의 불연속성, 학부모의 과학 실험 교육에 대한 낮은 우선순위 인식 등이 원인이었다. 사업은 어려움에 빠지고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마저 겹쳐 1998년 3월 창업한 회사를 떠나게 된다.한동안의 방황과 좌절 끝에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아 두부 배달하며 살자는 아내를 설득해 1998년 7월 몇 명의 후배들과 힘을 모아 지금의 창의와탐구를 창업했다. 이제는 그의 이상이 되어버린 과학 교육 사업으로 되돌아온 것이다.지극히 영세한 회사의, 연봉 1800만 원짜리 가난한 대표이사였지만 창의적 과학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길을 모색하던 그는 2001년 초 영재 교육 사업으로 사업 전환을 결심한다. 2000년 ‘영재교육진흥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고 그는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그동안 홀대받던 과학 교육이 영재 교육에서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벼랑 끝에서 극적으로 사업을 전환한 후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하며 회사는 5년 동안 매년 80% 이상씩 성장했다. 2001년 17억 원이었던 매출은 2006년 167억 원으로 성장했다.와이즈만의 과학 프로그램은 한 반에 최대 8명의 학생이 직접 실험하며 탐구하고 토론, 발표한다. 교사는 일방적으로 강의하거나 지시하는 대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도록 안내한다. 일부 수학 프로그램은 이스라엘의 국책연구소인 ‘와이즈만 연구소’와 계약해 도입했으며,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포함해 만든 와이즈만 영재 교육의 사고력 수학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수학에 대한 인식을 바꿀 만큼 독특하다. 1999년 설립된 기업 부설 영재교육연구소에서는 38명의 전문 연구원이 1200여 현장 교사들의 피드백을 반영하며 학생용, 교사용 프로그램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와이즈만이 선발하는 영재의 기준은 학계에서 통용되는 ‘평균 이상의 지능, 창의력, 과제 집착력이 있는 아동’이다. 1988년 영재교육법을 만든 미국의 경우 15~20% 상위층에 다양한 형태로 영재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영재 교육을 받고 있는 대상자는 전체 학생의 약 0.4%이며 2010년까지는 1%를 목표로 하고 있다.이에 비해 국내 대표적인 사설 영재 교육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와이즈만 영재 교육은 상위 30%의 학생들에게 영재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임 사장은 “회사의 사명인 ‘창의적으로 탐구하는 즐거움과 깨달음, 감동이 있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과학과 수학에 대한 자신감과 탐구 능력을 갖추고 사회 각 분야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소명”이라고 말한다.그는 2년 전 전국 100개 센터의 원장들과 함께 매년 순익의 3%씩을 모으는 ‘와이즈만 해누리’라는 사회 공헌 기구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마련된 재원을 토대로 국내 오지 및 소외 아동에 대한 과학 교육 지원 등에 나서고 있으며 매년 1억5000만 원 이상을 쓰고 있다.임 사장은 “20대와 30대에는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었고, 지금은 사업으로 그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그때의 가치 추구와 열정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사업을 생각할 수 없었거나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야만의 시대에는 혁명가가 필요했다면, 지금은 각 분야에 혁신적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때”라고 덧붙인다. 그는 “교육과 사업의 통일이 화두이며 도전 과제”라고 말한다.그의 책상 위에는 1993년 사업을 시작할 때 친구 박노해 시인이 감옥에서 보내준 ‘첫마음-한 번은 다 바치고 다시 겨울나무로 서 있는 벗들에게’라는 시가 적혀 있다.저마다 지닌/상처 깊은 곳에/맑은 빛이 숨어있다/첫 마음을 잃지 말자/그리고 성공하자/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첫 마음으로.약력 : 1957년 충남 연기 출생. 75년 대전고 졸업. 82년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및 쌍용양회 입사. 84년 노동운동 및 민주화 운동. 90년 경일학원 강사. 93년 ‘어린이 과학교실’ 창업. 98년 (주)창의와탐구 창업 및 대표(현). 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