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된 기업인수로 떼돈 ㆍㆍㆍ열두살 때부터 주식투자 등 돈 감각 뛰어나

세계 최고의 부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다. 그는 지난 1994년 세계 최고 부자에 오른 뒤 13년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올 2분기를 기점으로 게이츠를 제친 부자가 나타난 것. 주인공은 멕시코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67)이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카를로스 슬림의 재산은 678억 달러에 달해 592억 달러인 빌 게이츠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다 보니 슬림이 누구인지가 관심이다. 도대체 어떤 재주를 지녔고 어떤 신통력을 가졌기에 세계 최고의 부자 자리에 올랐단 말인가. 그것도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도 아닌, 멕시코 출신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단 말인가 등등. 궁금증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이와 함께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향한 앞으로의 쟁탈전도 관심이다. 슬림과 게이츠, 그리고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주인공이다. 이들의 부는 결국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주가가 얼마나 오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만큼 슬림이 세계 최고 부자 자리를 굳히리라는 보장은 없다.세계 최고 부자의 얘기는 일반인들로선 남의 나라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부자가 됐는지를 살펴보고, 과연 누가 최고 부자 자리에 오를 것인지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즐거움일 듯싶다.카를로스 슬림은 멕시코의 통신 재벌이다. 지난 2004년 그의 재산은 139억 달러, 세계 17위 부자였다. 당시 1위인 빌 게이츠의 466억 달러에 3분의 1 수준이다. 그 뒤 슬림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2005년엔 238억 달러로 4위에 오르더니 2006년엔 300억 달러로 게이츠와 버핏에 이어 3위에 랭크됐다. 급기야 경영 전문지 <포브스>가 지난 4월 발표한 순위에서는 버핏을 제치고 2위로 치솟았다. 포브스가 산정한 그의 재산은 531억 달러. 게이츠(560억 달러)에 불과 30억 달러 차이로 따라붙었다.이 차이는 상반기 중 역전됐다. 멕시코의 금융 전문 웹사이트 센티도 코문과 <로이터> 등은 슬림이 지분 33%를 소유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최대 이동통신회사 아메리칸 모빌의 주가 상승으로 슬림의 추정 재산이 게이츠의 추정 재산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지난 6월 말 슬림의 재산은 678억 달러. 게이츠의 592억 달러보다 86억 달러가 많다. 그 증가세가 엄청나 월가 전문가들은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다.슬림은 지난 1940년 레바논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버핏처럼 어릴 때부터 돈에 관한 재주가 남달랐다. 가족과 친지 모임에서조차 사탕과 담배를 사고팔았을 정도다. 주식 투자를 시작한 것이 열두 살 때. 이때부터 용돈 기입장을 썼다고 한다.특히 상업으로 성공한 그의 부친의 영향도 컸다. 그의 아버지는 멕시코시티에 ‘스타 오브 더 오리엔트’라는 상점을 열어 성공, 아들인 슬림에게 수백만 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그의 부친은 “어떤 위기가 와도 멕시코는 사라지지 않으며 이 나라에서 신용을 잃지 않고 건전한 투자를 하면 그 대가가 돌아온다”는 상도(商道)를 가르쳤다고 한다.초기 부동산으로 돈을 번 슬림은 대학 졸업 당시 음료회사 등의 지분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세계적인 부호의 대열에 오를 발판을 마련한 것은 1980년대. 남미 경제가 위기에 휩싸이면서 금융회사 등이 매물로 나오자 싼값에 사들여 경영을 정상화하는 수완을 발휘했다.그의 예지력이 돋보인 것은 1990년. 국영통신사 <텔레멕스> 민영화에 참여, 18억 달러를 주고 51%의 지분을 사들였다. <텔레멕스>는 현재 90% 이상의 시장지배력을 유지하며 매년 60억 달러의 순이익을 남기고 있다. 이에 따라 주가도 상승세를 타고 있으며 슬림의 재산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슬림의 식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동통신 시장에도 눈을 돌려 아메리칸 모빌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지난 2000년 이후 가입자 증가율이 매년 40%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전화 회사와 이동통신 회사를 발판으로 부를 움켜쥔 그에게 ‘통신 재벌’이란 별명이 따라붙는 게 당연했다.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통신 쪽에만 사업을 국한한 게 아니다. 건설과 석유, 전기, 자동차 등에도 진출했다. 금융그룹인 인부르사와 저가 항공사 볼라리스, TV채널 텔레비사 등을 사들여 말 그대로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다 보니 멕시코인들은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슬림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거대한 ‘독점적 재벌’이 된 셈이다.실제 그는 지주회사인 카를로스그룹을 바탕으로 거대한 금융-산업 제국을 형성했다. 보유 기업들만 합해도 멕시코 증시 시가총액의 절반을 차지한다. 가족까지 포함한 그의 재산은 멕시코 국내총생산(GDP)의 8%나 된다.당대에 부를 일군 그의 이력을 보면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나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을 떠올릴 만하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문어발식 재벌이 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비판론자들은 “슬림의 회사들이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다”며 독과점의 폐해를 지적한다. 그렇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슬림이 저평가된 기업들을 인수해 경영을 정상화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며 그의 사업적 재능을 높게 평가한다.그는 세계 최고의 부호이면서도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다. 부호들이 과시용으로 선호하는 호화 요트와 별장이 없다. 버핏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 전부터 살던 집에서 저렴한 ‘코히바’시가를 물고 있다. 유리창도 없는 그의 지하 사무실 에어컨은 종종 고장 나 있다고 한다.현재 세계 최고 부자 자리는 슬림과 게이츠, 버핏의 3파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대에 부를 일궜다는 점이 우선 꼽힌다. 또 돈에 대한 예지력이 남다르며 부자답지 않게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점도 공통점이다.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3명의 부자 되는 방법은 다르다. 게이츠는 ‘디지털’이란 신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부를 거머쥐었다. 그의 성공은 애플이나 구글, 야후 등과 함께 ‘벤처 신화’의 대명사다. 하루아침에 무에서 유를 창조함으로써 그만의 제국을 형성했다.버핏은 투자의 귀재란 별명답게 주식 투자를 통해 부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가치 투자’로 요약되는 그만의 투자 기법을 고수해 주식 투자로만 엄청난 부를 일궜다. 그의 성공은 ‘주식 자본주의’의 대명사로 꼽힌다. 주식 자본주의가 꽃피지 않았으면 버핏의 영화는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이에 비해 슬림의 부자 되기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 것과 비슷하다. 미국 등 선진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미국의 경우 산업 재벌이 거부를 움켜쥔 것은 이미 1900년대 초의 일이다. 록펠러나 카네기 밴더빌트 등이 그들이다. 이들 산업재벌을 거쳐 게이츠류의 벤처 신화, 그리고 버핏류의 주식 신화로 부자 탄생의 계보가 진화하고 있다. 최근엔 사모 펀드 설립자들이 엄청난 부를 움켜쥐는 등 부를 거머쥐는 방법도 달라지고 있다.이런 마당에 슬림이 거대한 산업 재벌로 세계 최고의 부자로 우뚝 섰다. 멕시코 같은 한창 성장하는 과정에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할법한 일이다. 따라서 제2, 제3의 슬림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나라도 개발도상국이다. 중국이나 인도 등이 첫 번째 후보다.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만큼이나 엄청난 부를 움켜쥐는 부자가 탄생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실제 인도 미탈그룹의 락시미 미탈 회장(320억 달러)은 이미 세계 10대 부자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최고의 부자가 나올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 최고 부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29억 달러로 세계 314위 부자다. 보통 사람에겐 꿈도 꾸지 못할 엄청난 재산이지만 슬림이나 게이츠에겐 한참이나 모자란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에서 세계 최고 부자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맞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 포브스는 지난 3월 세계의 억만장자 946명을 발표했다. 이 중 60%는 당대에 부를 일군 자수성가형 사람이었다. 자수성가란 스스로 부를 일군 사람들이다. 누구나 세계 최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하영춘·한국경제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