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일찍 점심 식사를 마친 K미디어 김홍준 해외사업팀장(37)과 팀원들은 회사 차로 대한상공회의소를 향해 바삐 출발한다. 지난 3개월간 꾸준히 추진해 왔던 영국계 파트너사와 마침내 오늘 신제품 투자 조인식을 갖기 때문이다.다행히 예정보다 여유 있게 도착한 일행은 예약해 둔 소회의실로 올라가 김 팀장의 지시에 따라 조인식에 필요한 각종 준비물을 배치하고 식순과 의전 등을 점검하는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예정 시각 5분 전에 양사 대표 등 임원진이 입장해 자리에 앉으면서 정시에 조인식이 시작된다. 예정된 식순에 따라 양사 대표자의 간단한 축사가 끝날 때마다 100㎡를 조금 웃도는 소회의실 공간이 박수 소리로 뜨겁게 달구어진다. 이윽고 오늘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투자 조인서 순서. 의전을 맡은 김 팀장이 양사 대표에게 조인서를 전달한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파트너사 대표가 조인서를 살펴보는 동안 김 팀장은 그 뒤로 다가가 정중한 목소리로 서명을 안내한다.Mr. Kim: May I have your sign here? (여기에 당신의 표시를 해주시겠습니까? [김 팀장의 원래 의도 - 여기에 서명해 주시겠습니까?])Mr. Lloyd: Sign? Oh, yeah, my signature! (표시라뇨? 아, 네, 제 서명 말이군요!)그 순간 ‘사인(sign)’이 콩글리시라는 생각이 떠올라 당황했지만 김 팀장은 그런 마음을 억누르며 애써 편한 표정으로 의전 임무를 계속 이어간다.Mr. Kim: Yes, would you please sign your signature here? (네, 여기 서명을 서명해 주시겠습니까? [김 팀장의 원래 의도 - 네, 여기 서명해 주시겠습니까?])Mr. Lloyd: Of course! I'll write my signature here. (물론이죠! 여기에 서명을 하겠습니다.)Mr. Kim: Here is a sign pen for you. (표기용 필기구는 여기 있습니다. [김 팀장의 원래 의도 - 사인펜은 여기 있습니다.])Mr. Lloyd: Thank you for the felt-tip pen. (사인펜을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이쯤 되면 이 시간에서 다루고자 하는 콩글리시의 대상과 내용이 선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각종 국제 조인식에서 빠질 수 없는 ‘사인’과 ‘사인펜’이 그 주인공이다. 언제부터인가 원래의 영어식 표현과는 무관하게 ‘사인(서명)=sign’, 그리고 ‘사인펜(서명용 필기구)=sign pen’이라는 등식 관계가 우리 사회에 널리 전파되면서, 본의 아니게 원어민과의 대화 과정에서 의사소통 장애를 초래하고 있다. 아래의 표를 살펴보면 그 심각성의 정도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이렇게 ‘사인’이 원래의 뜻을 벗어나 마구잡이로 쓰이다보니 K미디어와 영국계 기업의 투자 조인식에서조차 해프닝이 벌어지는가 하면, 경우에 따라 심각한 비즈니스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이와 관련, 한 가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존 핸콕(John Hancock)’이라는 표현이다. 존 핸콕(1737~93)은 미국 독립 선언 시절의 매사추세츠 주지사로, 당시 13개 주 중 독립선언문에 맨 처음 큼지막한 글씨로 서명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해 그의 이름을 보통명사인 ‘서명’을 뜻하는 단어로 즐겨 쓰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지금도 ‘서명해 주시기 바랍니다’란 말을 ‘I need your John Hancock’ 또는 ‘John Hancock, please’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비즈니스 업무상 주의를 요한다.이제 글로벌 시대를 지향하면서 우리만 알아듣는 콩글리시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씩 걷어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라이팅 머신(Writing Machine, www.ibt-writing.com) 같은 업무 지원용 소프트웨어를 현업에 도입해 그 효율성과 실효성을 높이는 등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From saying to doing is a long step!(말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발걸음은 거리가 멀다!)’이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그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마음과 뜻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이 멀고 어렵다는 뜻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다함께 마음과 뜻을 한데 모아야 할 때가 아닐까.염인호· ㈜TG연구소 대표연구원 www.ibt-writ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