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급 '핫러너 시스템' 업체 일궈 ㆍㆍㆍ100여 개국에 수출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구장리에 가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고딕식 건물을 볼 수 있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양쪽엔 멋진 소나무를 비롯해 각종 조경수들이 도열해 있다. 뾰족지붕을 이고 있는 붉은 벽돌의 이 건물은 유럽의 중세풍 성당이나 성채 모습을 하고 있다.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면 커피향과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복도 곳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그림과 조각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은 고풍스러운 호텔도 아니고 성당도 아니다. 유도실업의 본사이자 공장이다. 유영희 회장(60)의 남다른 예술 감각이 이런 회사를 이뤄낸 것이다.유도실업은 몇 가지 점에서 특이한 회사다.첫째, 창업자인 유 회장의 이력부터 독특하다. 그는 신부가 되려다 기업인이 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신부 수업을 받던 사람이었다. 담양 출신인 그는 광주 사레지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일반 학생들과는 별도로 신학 수업을 받았다. 4대째 가톨릭 집안인 유 회장의 부친은 자식 중 아들 1명은 신부로, 딸 1명은 수녀로 키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 회장은 광주 가톨릭대 신학부를 나와 대학원 재학 중 서품을 앞두고 사회로 발길을 돌렸다.둘째, 유도실업은 세계 정상급 ‘핫러너(hot runner) 시스템’ 생산 업체다. 핫러너 시스템은 캐나다 업체와 세계 시장에서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 회사는 작년 매출 531억 원에 당기순이익은 115억 원에 달했다. 그런 우량 기업인데도 일반인 중에 이 회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회사를 아는 몇몇 사람들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하라고 권유하면 유 회장은 특유의 잔잔하면서도 느린 톤으로 이야기한다. “글쎄, 굳이 상장할 이유가 없지요.”셋째, 중소기업이면서도 세계 100여 개국에 자기 브랜드로 수출한다는 점이다. 수출 가격 역시 내수 가격보다 평균 30%가량 비싸다. 해외 17개국에 지사 및 대리점을 두고 있고 30여 개국에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이 이 같은 글로벌 판매망을 갖추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일본 중국 대만 인도 등 아시아와 미국 멕시코 브라질 등 미주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에 판매망을 갖추고 있다. 전체 매출의 약 70%가 수출로 이뤄진다. 이 회사의 핫러너 시스템은 벤츠 BMW 도요타 소니 등 세계적인 회사들의 플라스틱 부품을 만드는 데 쓰인다.로봇을 만드는 유도스타자동화 등 자회사를 합칠 경우 유도 가족회사의 전체 매출은 지난해 약 1780억 원에 달했다. 이 가운데 수출이 약 620억 원을 차지하고 있다.유 회장이 신부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에 진출한 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사제 서품 직전 신부들은 회의를 거쳐 유 회장을 사회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자기주장이 강해 성직자보다는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재학 중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외국어를 중점적으로 공부했던 그는 대우전자에 입사해 무역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TV를 비롯한 가전제품들의 부품 가운데 상당 부분이 플라스틱으로 이뤄져 있고 이 플라스틱을 잘 가공하는 기계를 만들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우전자에 이어 금호전자 등에서 일한 뒤 1980년에 독립했다. 6년 정도의 사회 경험을 토대로 창업한 것이다. 서울 동교동 친구 사무실 한쪽 책상을 얻어 유도무역상사를 창업했다. 1인 회사였다.기계류 등의 오퍼업을 하면서 경험을 쌓다가 점차 직원을 늘려갔다. 사업 목표인 핫러너 시스템 개발에 나섰으나 기술 부족과 전문가 부재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스스로 공부해 원리를 터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공학 서적을 반복해 읽었다. 실험하는 과정에서 몇 차례 불을 내기도 했다.우여곡절 끝에 1980년대 중반 국내에서 처음으로 핫러너 시스템을 개발했다. 대기업 자회사에 처음 납품하고 어음을 받은 뒤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핫러너 시스템은 플라스틱 원료를 가열 상태로 공급될 수 있도록 유지하는 장치를 말한다. TV 케이스를 비롯해 자동차 대시보드 휴대폰 케이스 등 플라스틱으로 된 제품이 우리 주변엔 매우 많다. 이들의 대부분은 플라스틱 원료를 금형에 쏘아서 만든다. 이른바 플라스틱 사출물이다. 이때 플라스틱 원료를 쏘는 장치가 바로 핫러너 시스템이다. 마치 붕어빵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주입하는 기구와 흡사하다.핫러너 시스템은 ‘콜드러너(cold runner) 시스템’과는 달리 플라스틱 원료 주입 과정에서 이들 원료가 굳지 않아 바닥에 찌꺼기가 달라붙지 않는다. 그만큼 제품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이 제품은 3미크론의 정밀도로 가공된다. 유도실업의 공장은 무인 자동화공장이다. 이를 이 회사는 사이버공장이라고 부른다. 모든 가공과 이송이 자동으로 이뤄진다.핫러너 시스템을 개발한 뒤 1987년부터 일본 수출에 나섰다. 1989년에는 유럽 미국 남아시아 등지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외환위기 때였다. 생산제품의 상당수를 수출하던 유도실업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이 폭등하자 막대한 환차익을 얻었다.당시 이 회사는 종업원들에게 500%가 넘는 상여금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전부 재투자했다. 2000년엔 지금의 화성에 24시간 무인 운전을 할 수 있는 사이버공장을 준공했다.유 회장은 성장 비결에 대해 “차별화와 실사구시, 자생력에 의한 경영, 종업원 존중”이라고 말한다. 차별화란 타사와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 100% 고유 브랜드 수출 전략이라든지 무인 자동화공장, 수출 가격을 내수 가격보다 높이 책정하는 것도 이런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다.이 회사는 또 학력 차별과 지역색이 없는 회사다. 유 회장은 “유도실업의 전체 직원 250여 명 가운데 전문대와 대졸자가 90%를 넘는데 생산부장을 32세의 전문대 출신이 맡고 있는 게 학력 차별이 없는 한 예”라고 설명했다. “학력 수준을 불문하고 전문서적을 열심히 찾아 읽으면 누구나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유도실업은 공부하는 분위기 덕분에 70여 건의 특허를 획득했거나 출원해 놓고 있다. 이 같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핫러너 시스템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고 1000개가 넘는 업체들이 경쟁하는 세계 시장에서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또 하나는 실사구시 정신이다. 유 회장은“해외에 지사를 낼 때는 1인 지사를 원칙으로 하며 차고 같은 사무실과 컴퓨터 1대, 자동차 1대, 휴대폰 1대가 지원책의 전부”라고 말했다. 현지에서 벌어서 확장하는 전략이다.번 돈의 범위 내에서 투자하는 ‘자생력에 의한 경영’을 모토로 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은행 부채가 약간 있기는 하지만 예금 등 현금성 자산을 감안하면 이 회사의 부채는 사실상 제로다. 종업원 존중 경영으로 여태껏 노사갈등이 없었다. 쾌적한 사무실과 공장도 이런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는 자회사인 유도로보틱스를 통해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한 로봇 개발에 나서고 있다. 중증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이동을 돕는 ‘자동침대’와 ‘보행보조 로봇’ 등을 개발하고 있다. 3D 업종이라고 기피하는 금형 분야를 전공하는 고교생과 대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원하고 있다.유 회장은 못 이룬 신부의 꿈을 종업원 사랑과 소외 이웃 사랑을 통해 실천하려는 듯하다.약력:1947년 전남 담양 출생. 66년 광주사레지오고 졸업. 73년 광주 가톨릭대 신학부 졸업. 74년 대우전자 수입과장. 76년 금호전자 구매과장. 80년 유도무역상사 창업(지금의 유도실업). 92년 유도스타자동화 창업. 2003년 유도전자 설립. 수상: 은탑산업훈장. 2000만 달러 수출탑. 중소기업은행 명예의 전당 헌정 등.김낙훈 편집위원 nhkim@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