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이 여든. 그해 마지막 가을도 그렇게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음력 9월이면 시골집에 일곱 남매가 모두 모이는 아버지 생신이었다.“올해는 너그들이 직접 고구마를 캐야 쓰것다.”해마다 10가마 남짓 수확하는 고구마며 고춧가루, 참기름, 검은콩, 검은깨, 메주, 팥 등을 일곱 몫으로 준비해 두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편도암으로 1년 8개월여를 고생하시다 이듬해 세상을 떠나셨다. 여든 평생, 아버지는 내게 행동으로, 마음과 눈으로 많은 것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신 훌륭한 스승이셨다.지난 1975년 2월 16일, 육군 대위로 근무하던 광주에서 결혼식을 치른 나는 태어나고 자란 전북 정읍시 옹동면 오성리 제내마을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폐백을 올렸다. 처가 손님을 비롯해 많은 어른들이 함께 했다. 폐백을 마친 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정연이는 형이 초등학교 때 일찍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려 큰아들이 되었지요. 우리 집 가훈이 ‘언행일치(言行一致)’로, 언충신(言忠信), 행독경(行篤慶)의 깊은 뜻이 있는데 제가 아버지로부터 귀가 아프게 듣고 살아 왔으며, 나도 아버지 뜻대로 행동하고 처신해 왔습니다. 제 자식들에게도 알려줄 만큼 알려주어서 매사 사람들에게 가려서 행동하고 처신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 지 마누라한테도 잘할 겁니다. 사돈어른 걱정 안해도 될 겁니다.”정삼품(正三品)에 해당하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벼슬을 하신 할아버지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셨던 아버지는 한때 ‘백구두 신사’로 알려질 만큼 공부를 멀리하고 노는 데 젊음을 보내시기도 했다. 그러나 품성이 강직하고 사리가 분명한 분이어서 엄격한 할아버지의 교육 덕에 실속 없는 세월을 접고 익힌 한자와 초서 필체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던 실력자였다.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회지로 나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서울에 근거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물려받은 유산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거듭된 실패는 아버지의 의지마저 앗아가 버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역경에 처한 적도 있다. 인생 역정을 겪으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자 텁텁한 막걸리로 하루 요기를 하고, 이따금 불만 섞인 투정이 주위 사람과의 언쟁으로 번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맑으실 때는 몸소 하숙집까지 오셔서 “사람은 항상 열심히 살아야하는 거여,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가훈이 뭔지 알고 있겠지? 언행일치라는 것은 언충신, 행독경에서 우러나오는 거여. 이 말은 바로 남을 괴롭히지 말고 선하게 살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거여.” 남의 재물은 항상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어렵게 말을 꺼내기도 하셨다.아버지는 편도암이라는 병마와 싸웠기 때문에 말씀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임종까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지만 말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생에 전하지 못한 마음의 한을 내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가슴에 담고자 애썼다.“이제 저를 믿고 편안히 눈을 감으세요. 아버지!”그러자 눈을 스르르 감으셨고, 그것이 곧 아버지와 나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살갑게 전하지 못한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이 이제 내 가슴에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허전함이 더해져만 갔다. 그래서일까. 아버지가 가신 지 두 해가 흘렀지만 그 숨결이 아직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에는 팽배해진 개인주의로 인해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인간관계와 그 모순들을 왕왕 접하게 되는 것 같다. 남이야 어떤 상황에 처하든 나만 살면 되는 비정한 세태 속에서 나의 올바른 처신은 무엇일까. 이럴 때마다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언행일치의 참뜻을 알려주어 그 깊은 뜻을 헛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글/ 이정연 광운대 총무처장1948년생. 동덕여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8년째 광운대 총무처장을 맡고 있다. 현재 서울시의회 입법고문 및 정책연구위원, 서울시 노원구 교육발전위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