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있는 여성 CEO ‘팍팍 밀어 주세요’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1980년대에 비하면 환경이 무척 좋아졌죠. 하지만 아직 고칠 게 너무나 많습니다. 여성 기업인을 보는 시각도 여전히 편견 투성이고요.”베테랑 사업가로, 한국여성경제인협회(아하 여경협)중추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최금주 화이버텍 대표, 손인춘 인성내츄럴 대표, 송영숙 법무법인 두라 변호사는 2시간 남짓 진행된 좌담회 내내 격정의 대화를 이어갔다. 여성 기업인의 현실, 일과 가사, 정부 정책 등 이야기 주제 하나하나가 자신의 경험과 직결된 것들이어서 ‘할 말’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정받는 사업가로 우뚝 서기까지 온갖 세파를 헤쳐 온 사연은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였다. 최 대표와 손 대표의 경우 공교롭게도 공장에 불이 나 심각한 화상을 입은 경험을 똑같이 갖고 있었다. 여성 기업가들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송 변호사는 “수많은 여성 기업가들을 보면서 배우는 게 많다”고 말했다.마침 이날 ‘한국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라는 소식이 보도됐다. 대졸 이상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며 경제 활동을 하더라도 결혼, 출산, 육아 때문에 상위직 이동이 쉽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간담회는 이 뉴스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자연스레 시작됐다.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이 정도로 낮은지 몰랐습니다.최금주 대표(이하 최 대표): 가장 큰 장벽이 임신, 출산, 육아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남성의 육아 휴직 허용 같은 제도는 공무원 또는 대기업 조직에서나 통하는 일입니다. 솔직히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꿈도 못 꿔요. 실제 활용할 엄두가 나질 않아요.손인춘 대표(이하 손 대표): 1985년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초보 사업가에다 초보 주부였어요. 첫 아이가 6개월 때 유모가 오지 않아 방문을 잠가 놓고 나간 적도 있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나 자신이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출산 관련 휴가나 임금, 업무 공백이 중소기업엔 큰 부담이거든요.그러면 해결 방안은 뭐라고 보십니까.손 대표: 온 사회가 육아를 도와줘야 합니다. 구립 탁아소는 아이를 낳자마자 신청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군요. 회사 내에 탁아소를 만들라고 주문만 하지 말고 실제 지원책을 내놔야죠.송영숙 변호사(이하 송 변호사): 탁아는 전문가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되도록 많이 설립하는 게 중요해요. 동사무소 통폐합 후 빈 공간이나 빈 파출소 자리를 활용하면 좋잖아요. 일단 인프라를 많이 깔면 굳이 기업이 힘들여 탁아소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육아만 도와줘도 일하는 여성이 크게 늘 겁니다.여성 혼자 힘으로 사업체를 키우기까지 과정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최 대표: 미국에서 예쁜 쟁반을 보고 ‘나도 한번 만들어보자’ 한 게 사업으로 이어졌어요. 25년 전 스물여덟 살 때 구로에서 공장을 돌리고 영업을 뛰면서 숱한 차별을 경험했지요. 젊은 여자가 뭐하냐는 소리는 수없이 들었고요. 공장에 불이 두 번이나 났는데, 그때 입은 화상이 팔과 몸에 그대로예요. 수해 때문에 물이 책상 위까지 들어찬 적도 있고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집과 공장, 거래처 밖에 몰랐어요. 그 덕인지 외환위기에 인력 구조조정 없이 버틸 만큼 탄탄한 회사로 키웠죠.손 대표: 7년 동안 여군 생활을 한 뒤 회사를 설립했어요. 한의사였던 아버지가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가능성을 보시고 사업을 권하셨죠.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초창기 멤버인 셈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무지 고생했어요. 특허를 가지고 가도 대출을 받기 어려웠어요. 공장에 불이 나 화상을 입은 적도 있고요. 두 아이에겐 ‘너희보다 엄마를 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며 일을 했습니다.송 변호사: 30대 중반에 사시에 합격하고 나서 기업 전문 로펌에 입사해 지금의 법무법인을 개업했어요. 변호사가 고도의 전문직이지만 나이가 많다고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여러 번 당했답니다. 그런데 개업을 하고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더군요. 중소기업, 특히 여성 CEO들을 자주 만나면서 많은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최 대표: 여자가 기업한다고 그런지 온갖 단체, 기관에서 돈 내라는 요구가 많았어요. 집적대는 이들도 적지 않았죠. 기업인 모임에선 CEO가 아닌 ‘꽃’으로 보는 시각이 여전해요. 핵심 정보는 남성들끼리 공유하고 여성 기업인들은 이삭이나 줍는 꼴이 되는 경우도 많아요. 무엇보다 남성이 CEO인 기업과 차별하는 걸 참을 수 없어요. 정부도 정책자금을 지원하면서 여성 기업에 유난히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곤 합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여자가 그만하면 잘하는 거지~’라는 말입니다.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여자, 남자 구분이 왜 필요한지요.손 대표: 지원 정책들이 현장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립 서비스’만 잔뜩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한때 대출이 막혀 사채를 끌어다 쓸 정도로 힘들었을 때 자금 지원을 받았다가 절차가 너무 복잡해 신규 사업 자체를 포기한 적도 있어요. 모든 잣대가 남성보다 엄격하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어요.송 변호사: 여성 기업인들은 우선 남자들보다 네트워크가 약해요. 여경협의 CEO들을 만나보면 법률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계약서를 보면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경우도 있어서 종종 마음이 아프기도 해요.그래도 여성 CEO만의 강점이 있을 텐데요.최 대표: 여성 기업인만이 가진 모성애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 부지런함은 남성과 비교할 수 없는 경쟁력입니다. 특히 구성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경영 방식은 어려울 때 반드시 큰 힘이 되지요.손 대표: 겉으로 으스대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여성 기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는 게 아니라 비록 더디더라도 바른길로 가는 여성 CEO들이죠. 여성은 감성과 결단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 더 강한 겁니다.송 변호사: 여성 기업의 부도율은 전체 평균보다 훨씬 낮습니다. 특유의 섬세함과 부지런함, 빈틈없는 일처리가 기업을 튼튼하게 만드는 거죠. 여경협의 여성 기업 지원 제안에 대해 역차별이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여성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선 먼저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먼저라고 봅니다. 그것마저 용납하지 않겠다는 건 지나친 기득권 주장이에요.가장 절실한 문제는 뭡니까.최 대표: 제조업의 성패는 디자인이 쥐고 있어요. 하지만 중소기업이 좋은 디자인을 쓰기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국내 유명 화가의 작품을 쓸 경우 외국에 비해 비용이 수십 배 더 들어가요. 그래서 고민을 해봤는데, 중소기업청이 나서서 디자인 풀을 만들어 기업들이 갖다 쓸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자금 지원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해요.손 대표: 창업자금, 연구자금 등 지원 자금을 받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순수한 용도로 쓰지 않는 일부 기업들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엔 동의해요. 하지만 주변에서 보면 남성 CEO들은 엄청난 금액을 너무 쉽게 가져가곤 합니다. 여성 인력을 활용하고 여성 기업인을 지원하려면 이런 문제부터 고쳐야 되지 않을까요.송 변호사: 대부분의 여성 기업은 규모는 작지만 속이 알찬 곳이 아주 많아요. 정부나 지도층에서도 여성 CEO가 기업을 착실하게 키운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허울 좋은 것에 더 끌리는 것 같아요. 작으니까 무시하는 풍토가 여전하지요. 그래서 정작 필요한 지원이 여성 기업에 닿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작은 기업을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부터 필요합니다. 참석자 : 최금주 화이버텍 대표, 송영숙 법무법인 두라 변호사, 손인춘 인성내츄럴 대표(사진 왼쪽부터). 최 대표는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쟁반과 컵, 받침대 등에 접목한 패션 생활용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손 대표는 건강기능식품 전문 회사를 운영하며 신지식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송 변호사는 로펌을 거쳐 법무법인 두라를 설립, 중소기업에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