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아들 녀석을 데리고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했다. 홀로 월남하신 터라 유난히 큰손자에 대한 애정이 크신 할아버지를 데면데면하게 맞는 아들 녀석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내가 못하는 살가움의 표현을 아들 녀석이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것이 너무 큰 소망인 듯 개구쟁이 아들은 이미 너무 커버렸나 보다.몇 해 전만 해도 성질 급한 아버지는 우리들 그 누구보다도 잰 걸음걸이로 거리를 활보하셨는데 이젠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시는 당신에게서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지난 10여 년 하루가 다르게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당신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빈자리를 찾는다. 1998년 9월 그때도 지금처럼 화사한 날씨가 대지를 밝히던 때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머니의 죽음은 한순간 우리 가족을 광풍 속으로 휘몰고 갔지만 어느 누가 아버지가 맞는 충격에 비할 수 있었을까.겉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셨지만 아버지의 어깨가 처져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 그때부터였다. 한평생 티격태격하며 사시던 부모님, 애증이 교차해 보이시던 부모님. 그것이 부부간의 사랑의 표현이었고 미움이었음을 느낀다. 나 또한 똑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가신 후 언젠가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싸울 상대라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싸울 대상이 없는 나는 책과 씨름할 뿐….” 함께 할 대상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퍼 보였다. 자식 그 누구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가계를 이을 장남이라는 이유로 서울로의 유학을 반대하시던 할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남동생의 돌 잔칫날,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해보겠다고 떠난 고향집. 아버지의 뜻을 꺾지 못한 할머니는 여비로 오징어 열 축을 싸주며 열여덟 살 아들의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불효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떠나온 유학은 아버지에게 한평생 불효자라는 멍에를 씌우고 마는 가족과의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다.재작년 육십여 년간의 생이별 속에 북에서 온 편지는 당신의 마음을 들뜨게 했건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작고하신 지 이미 20여년이 지났다고 씌어 있었다. 다녀오겠다는 인사 한번 제대로 못하고 줄행랑치다시피 떠나온 고향의 부모님께 불효를 했다는 죄책감인지 자라는 동안 우리 앞에서 이북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을 보지 못해 당신은 이북의 가족에 대해 정이 없는 차갑고 냉정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알았다. 아버지는 슬픔을 삭이는 방법이 남들과 다를 뿐이라고.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사시기보다는 당신의 시(詩)에 슬픔을 녹인다는 것을 알았다. 굴곡진 삶을 예술로 승화한 당신에게 일본의 어느 여류 시인이 헌시(獻詩)에 ‘한국의 율리시즈’라고 지칭했던 시구가 떠오른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족을 그리워하며 사시는 아버지의 애달픈 마음을 아버지의 시를 통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쳐 치열하게 삶을 사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완고하시지는 않았지만 다정다감하시지도 않으셨다. 언제나 아버지는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아버지셨다. 당신만의 세계에서 사시는 듯한 아버지를 대신해 나는 동생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셨지만 아집과 편견이 강해 가족을 힘들게 하셨던 아버지. 당신의 잣대를 내세워 누구와도 타협하시지 않는 당신의 성격으로 탄탄대로를 달릴 수 있는 상황을 힘들게 살아야 했기에 자식으로서 답답해 보이고 야속하기도 했다.그러나 이젠 아버지만의 삶의 방식으로 우린 더욱 강건해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거친 이 세상을 뚫고 나갈 힘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가족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부를 좇기보다는 명예를 택하신 아버지와 끈끈한 가족의 정을 가지도록 가르치신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이제 중년을 훌쩍 넘긴 내가 아버지가 되어 우리 자식에게 물려줄 무엇이 있나 하고 자문해 본다. 언제나 당당하신 아버지 앞에서 초라해 보일 뿐이다.글/ 김상수김광림 시인의 장남으로 1956년 출생해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을 졸업한 후 82년 진로에 입사, 홍보담당 이사를 역임했다. 2005년 홍보대행사 브릿지커뮤니케이션 사장 등을 거쳐 그해 12월 바움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하고 대표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