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세 때 연행길… <열하일기> 탄생시켜

그는 가난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먼저 밥벌이를 위해 상선을 타고 선원 생활을 하다 증권거래소의 점원이 됐다. 25세 때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35세 때 세잔 등 화가들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화가의 길을 걸을 결심을 하고 이듬해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했다. 직장을 그만두자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아내와도 헤어졌다. 44세 때 문명 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가 <타히티의 여인들> 등 그림을 남겼다. 그는 다름 아닌 폴 고갱(1848~1903)이다.인생의 여정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터닝 포인트를 절실하게 느끼는 때가 바로 40대라고 한다. 더욱이 요즘에는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40대를 인생 2막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50대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좀 두려울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나서려면 40대가 적격이라는 것이다.그런데 그러한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회가 와도 기회인 줄 모르고 지나가기 때문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놓쳐버린다는 것이다.고갱의 터닝 포인트와 인생 역정은 어쩌면 연암 박지원과 닮아 있다. 물론 연암이 90여 년 앞서 태어나 두 사람이 살다간 시공간이 다르지만 고갱의 역할모델이 연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은 가난과 일에 대한 열정마저 닮아있다. 그렇지만 고갱의 부인이 가난 때문에 남편과 헤어진 반면 연암의 부인은 결코 남편과 가난을 탓하지 않았다.10년 가까이 실학에 매진하던 연암은 44세 때에 연행(燕行: 사신이 중국의 북경에 가던 일)길에 오르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북경을 거쳐 열하에 가는 6개월간의 여정을 통해 연암은 자신을 세상에 우뚝 서게 한 <열하일기>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연암의 생애에서 터닝 포인트는 바로 이 연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당시 벼슬도 없어 ‘백수’로 지냈던 연암이 연행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8촌형인 박명원(영조의 사위) 덕분이었다. 연암은 44세 때인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연의 사신단을 이끈 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 박명원의 수행원 자격으로 5개월 동안의 연행에 오를 수 있었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過庭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마침 아버지의 삼종형인 금성도위(박명원)께서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북경에 가시게 되어 아버지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그리하여 5월에 길을 떠나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 곧이어 열하로 가셨다가 그달에 다시 북경으로 왔다 10월에 귀국하셨다.”<열하일기>에는 가난한 조선에 절실했던 신문물을 소개하는가 하면 문체의 혁신이라는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 명분보다 실리를 주장하는 연암은 당시 보수파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이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명성을 얻을수록 연암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이들도 생겨났다. 연암은 평생지기인 홍대용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옛 사람의 말 가운데 ‘걸핏하면 비방을 받지만 그래도 명성은 따른다’라는 말은 아마도 허무맹랑한 말인가 하외다. 한 치의 명성을 얻으면 비방은 그 열 배나 돌아오는 법이니….”인간의 삶에서 터닝 포인트는 결코 우연하게 다가오는 게 아니다. 흔히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 말이 있지만 준비가 없으면 그 기회를 포착할 수 없다. 연암은 과거시험을 단념하면서부터 처자식의 생계를 돌보지 않을 정도로 실학 연구에 빠졌다. 그렇게 10년을 보냈기에 당시 조선의 상황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았고 그 실마리를 연행에서 터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용후생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열하일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명분에 사로잡혀 있고 부패하기까지 한 조선의 현실에 대한 자각은 사신단의 비공식 수행원에 불과했던 연암으로 하여금 <열하일기>를 쓰게 한 에너지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연암에게 ‘연행’이라는 터닝 포인트는 ‘불가식(不家食) 정신’으로 10년의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 찾아온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